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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소년이 온다-한강

DidISay 2014. 9. 12. 01:03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한강의 신작 '소년이 온다'는 사실 세월호 사건 이후에 마음이 너무 뒤숭숭해서

차마 손이 가지 않던 책이었다.

그래서 신간이 나오는 대로 구입하는 작가임에도 몇달이 지나서야 사게 된 책.

 

사실 책을 사게 된 과정도, 서점에서 잠시 약속시간을 보내려고 집어들었다가,

눈물자국이 여기저기 찍힌 책을 그대로 내 책장에 꽂게 되었다.

한강 작가의 문체가 굉장히 건조한 편이라, 그녀의 소설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읽는 순간순간 그 건조함에 더 울컥하고 마음이 아팠다.

 

이전 작품에 비해 스토리라인이 뚜렷한 편이라 훨씬 빠르게 읽혔고

대화 중간중간 의도적인 호흡 조절이 느껴져서 감정이입이 쉬웠다.

 

 

 

 

 

이 소설은 광주민주화 운동을 둘러싼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시점을 바꿔가며 전개하고 있다.

대부분 실제 있었던 사건들과 대화를 기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긴 하지만 현실이 강하게 반영된 작품이다.

 

같은 소재를 다룬 대부분의 책이, 후일담 형식이거나 혹은 당시 현장만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라면

한강의 작품은 서술자의 변경을 통해서 하나의 사건을  다각도로 우리에게 펴보인다.

그래서 마치 퍼즐을 맞추듯 후반부로 갈수록 각 인물들과 그 주변인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고 어떤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가 구체화되는데

그 과정이 참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5월 광주. 도청 앞에서 무참하게 학살된 소년과 그의 누이.

용케 살아남았지만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신들을 수습하며 밤을 지키다가

결국 계엄군에 의해 처형당한 소년의 친구.

 

그리고 계엄군에 의해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

풀려났지만 마치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계속해서 그 날의 기억을 안고 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광주의 수많은 시민들..

 

그리고 기억을 잊을만 하면 용산으로. 세월호로.

계속해서 수면으로 떠오르는 그날의 현장들.

단한번도 약자가 승리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건들.

아무 것도 변한 것 없이 오히려 후퇴하는 것 같은 양심들.

 

 

 

 

아버지의 고향이 전남인 까닭에, 지금도 많은 친지들이 광주에 살고 있고

일가의 대부분이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각자의 삶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혹시 광주에 관한 화면이 나오면 우린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채널을 돌려버리고

그 누구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내가 어릴 때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래서 내가 처음 이 일을 구체적으로 깨닫고 분노하게 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 어느 사진전을 통해서였다.

내가 태어나기 고작 몇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초등학교 때인가...

처음 교과서에서 이 사건을 접하고 차마 아버지에게 여쭤볼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너무 끔찍한 사건이라..혹시라도 아빠 마음이 아플까봐.

나중에 물어봐야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면 한 사람의 성인과 성인으로

다시 이야기 할 수 있을텐데.

오늘은 문득. 아빠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이 책의 말처럼.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인간은 결국 혼자라면.

얼마나. 얼마나 외로울까.

 

 

 

 

나무들은 하루에 딱 한차례 숨 쉰다고 했다. 해가 뜨면 길게 길게 햇빛을 들이마셨다가, 해가 지면 길게 길게 이산화탄소를 내쉰다고 했다. 그토록 참을성 있게 긴 숨을 들이 쉬는 나무들의 입과 코로, 저렇게 세찬 비가 퍼붓고 있다.

 

 

 

이상하게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을 만날 수 없는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 세상에서 만나자는 말 따윈 의미 없는 거였어.

 

 

다음의 일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기억하라고 나에게 말할 권한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선생도 마찬가집니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줄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 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체포 당시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아 단순 가담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유월까지 차례로 석방되고, 이른바 극렬분자, 총기 소지자들만 상무대로 남았습니다. 고문의 양상이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구타보다 정교하게 고통을 주는 방식, 고문하는 사람들의 체력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을 그들이 택한 것입니다. 비녀 꽂기,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 고문.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들의 세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련한 각본에 우리들의 이름으로 빈칸을 채울 수 있도록,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거짓 자백뿐이었습니다. 김진수와 나는 여전히 식판 하나를 받아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습니다. 몇시간 전에 조사실에서 겪은 것들을 뒤로 하고,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묵묵히 숟가락질을 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식판을 내려놓고 소리쳤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처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으르렁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한 남자애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 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아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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