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고령화 가족-천명관 본문

소리내어 책 읽기

고령화 가족-천명관

DidISay 2012. 12. 28. 14:35

예전에 남자친구가 명절에 부모님께 용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장인인데 아직도 용돈을 받아?'라고 장난스럽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대답이 꽤 신선했는데,

'노인네들 늘그막에 이렇게 자식들한테 조금이라도 용돈 쥐어주시는게 쏠쏠한 재미신가봐.

이제 다 퇴직은 하셨지만, 부모 노릇하시는 기분이라고 받아가라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나도 이제는 별말 없이 용돈 드리고, 명절에 가면 나도 받고 그래' 라고 했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우리 엄마도 이제 요리를 다 할 줄 아는 나에게

언제나 본가에만 가면 그렇게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쉴새 없이 내 입에 물려주려고 안달이셨던 것이다.

마치 내일이면 굴 파고 길고긴 동면에 들어갈 북극곰 마냥.

 

그러면 나도 '아..엄마, 나 배부른데' 하면서도, 아기새가 어미새의 모이를 받아먹는 심정으로

또 그렇게 이런저런 맛난 것들을 입에 밀어 넣곤 했다.

왜 유치원 때는 그렇게 밥 먹기를 싫어해서, 엄마를 속상하게 했을까..반성하면서.

 

 

 

천명관님의 '고래'를 워낙 인상깊게 읽었어서,

'나의 삼촌 브루스 리'나 '고령화 가족'을 함께 구매했었다.

 

그런데 '고래'는 확실히 인상깊은 소설이긴 했지만

만연체에 마치 판소리 사설처럼 얼키설키 엉켜서 끝도 없이 구비구비 흘러가는 느낌이라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책에 비해서 훨씬 피로도가 더 높았다.

현대 소설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문체였으니까.

 

그래서 이 '고령화 가족'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아 그냥 방치하다가,

퇴근길에 별생각 없이 집어 조금씩 읽게 되었는데

의외로 책장이 가볍게 넘어가서 하루만에 다 보았다.

 

 

 

  팔 수 있는 물건들은 모두 팔아치웠다. 맨 처음 판 것은 십 년 된 중고 자동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을 팔았고 냉장고와 세탁기, 노트북을 팔았다. 곧이어 책과 비디오 컬렉션까지 몽땅 팔아치워 방 안엔 낡은 매트리스 하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몸이라도 팔 수 있었다면 기꺼이 팔았겠지만 머리가 벗어져가는 마흔 여덟의 중년 남자를 사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주인으로부터 당장 집을 비워달라는 최후통첩을 받았을 때 나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낭떠러지 끝에서 몸을 날리는 것뿐이었다.

 

  엄마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바로 이즈음이었다, ....요금이 밀려 겨우 수신만 되는 전화기를 통해 엄마와 나는 오랫동안 반복해온 대사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주고받았다. 평소대로라면 '알고 있어요' 다음에 '걱정 마세요'가 있지만 그날은 도저히 '걱정 마세요'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침도 굶고 있었던데다 다음날이면 당장 집을 비워주어야 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곧바로 마을 잇지 못하다 갑자기 생각난 듯 불쑥 물었다.

 

-닭죽 쑤어놨는데 먹으러 올래?

 

  이 대사는 서너 번 전화하면 반드시 한 번쯤은 등장하는 레퍼토리였다. 메뉴는 대개 닭죽이나 잡채, 콩국수 같은 평범한 음식들이었지만 엄마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면 특별식인가보았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엄마의 초대에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바빠서 못 가요'나 '나중에 갈게요'정도의 대답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은 상황이 달랐다. 엄마가 닭죽을 먹으러 오라고 한 순간,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그리고 입안 가득 진한 닭죽의 풍미가 느껴지며 냄비에 가득 담긴 닭죽을 마구 퍼먹고 싶은 욕구가 맹렬히 솟구쳤다. 그래서 나도 몰게 그만 '네'라고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매번 거절만 당하던 엄마가 뜻밖의 대답에 놀라 다시 물었을 때, 나는 울컥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지금 간다고요, 엄마.

 

 

이 작품은 이런저런 복잡한 사연이 있는 아들과 딸들이

모두 결혼이나 사업 등등으로 출가를 해서 살다가

인생의 실패를 하고 다시 엄마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덕분에 24평 연립주택에서 5명의 사람들이 복작거리며 생활하게 된다.

 

이들은 4,50대의 중년층임에도 불구하고 성숙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긴 하지만,

엄마를 제외하면 유대감이 깊다거나 애틋함이 넘쳐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간 쌓아온 온갖 세월의 무게 때문에 서로에게 실망하고 질린 구석이 더 많다고 할까.

이들은 사실 자신들의 앞가림 하기도 허덕이는 처지라,

누군가에게 사랑이나 관심을 쏟아부을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고령화 가족'은 혈연으로 묶여 있는 '가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대안적 형태로서의 공동체인 '가족'에 더 적합하다.

 

 

 

 

 

문장은 전체적으로 술술 잘 읽히는 편이고,  

미려한 표현이나 거창한 비유도 없어서 좀 가벼운 느낌이 든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심심할 때 별 생각없이 읽기에 적합하다.

 

읽는 내내 영화처럼 살짝 과장되고 들뜬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 지금 박해일, 공효진 등이 출연하는 작품으로 영화화 중이다.

(개인적으로 저 조합으로 어떻게 이 작품을 끌어나갈지 불안하긴 하지만;;

좀더 팬시한 고령화가족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박해일과 고령화란 말 자체가 안어울리는-_-; )

 

심각한 사회 비판이 있다거나 뜨거운 감동도 존재하지 않는다.

촘촘하고 개연성이 뛰어난 작품도 아니다.

 

그저 한바탕 약장수의 말을 듣듯이, 글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슬슬 쫓아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최근의 엄마에겐 의아한 대목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온 식구가 한데 모여살면서부터 엄마에게 알 수 없는 활기가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나이보돠 젋어 보인다고는 하지만 엄마는 이미 칠순이 넘은 노인이었다. 게다가 근래에 엄마에게 기분 좋을 일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막내딸 미연까지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쫓겨나 엄마로선 그야말로 혀를 깨물고 죽어도 시원찮을 상황이었을텐데도 엄마는 마치 물 좋은 온천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얼굴에 생기가 넘치고 목소리까지 한 톤 더 높아졌다.

 

  그날,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기를 먹다 문득 엄마를 쳐다보니 그녀는 어느새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 우리들이 먹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표정은 오래 전, 엄마 앞에 제비새끼들처럼 나란히 앉아 밥을 먹을 때 어린 우리들을 지켜보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저 못입히고 못 먹이는 자식들을 안쓰러워하는 눈빛과 그래도 열시히 먹고 잘 자라니 다행이라는 흐뭇한 미소가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나는 그날 삼겹살을 굽는 자리에서 다시 목격한 것이다.

 

  자식들이 장성해 머리가 희끗해져가는 중년이 되었어도 엄마 눈엔 그저 노란 주둥이를 내미로 먹을 것을 더 달라고 짖어대는 제비새끼들처럼 안쓰러워 보였을까? 그래서 비로 자식들이 세상에 나가 무참히 깨지고 돌아왔어도 그저 품을 떠났던 자식들이 다시 돌아온 게 기쁘기만 한 걸까?

   

 

 

 

 

덧) 작가가 헤밍웨이의 팬인지, 곳곳에 그의 작품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몇은 나도 가지고 있는 책이라서 반가웠다.

다시 그 책들을 펼쳐봐야 겠구나 싶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