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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김영하

DidISay 2012. 12. 29. 11:34

 

 

김영하 작가의 오빠가 돌아왔다를 꺼내든건 그의 팟캐스트를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다.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역시 술술 읽혀서, 다른 일들 때문에 책을 한두번 덮은 것을 제외하면

거의 중단하지 않고 단시간에 읽을 수 있었다.

 

2004년에 나온 동명의 단편집이 재출간된 것인데,

내가 가지고 있는 판본은 2010년에 나온 후자의 것이다.

 

 

 

이 책을 이렇게 오래 방치해둔 것은 김영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뭔가 불편하고 갑갑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건 비교적 위트가 넘치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같은 단편집에서도 그랬고

'빛의 제국'이나 '퀴즈쇼'와 같은 장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난 그의 장편집을 꽤 힘겹게 읽거나 아니면 차라리 빠른 속도로 끝내버리는 편이었는데

같은 이유로 딱히 리뷰를 남기고 싶지도 않아서 항상 읽은 뒤에 그냥 넘겨버리곤 했었다.

그나마 단편은 조금이나마 중간중간 호흡이 끊어지기 때문에, 그럭저럭 견딜만해서 읽기 시작하게 되었다.

 

뭐랄까. 그의 작품을 싫어하는건 아니고 신간이 나오면 보긴 하는데

또 그러면서도 가까이 한다거나 계속 거듭해서 보고 싶진 않은. 그런 모순적인 마음이 드는 것이다.

마치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싫어하면서도, 신작이 나오면 나중에라도 챙겨보게 되는 것과 비슷한.

아 이건 무슨 마조히즘도 아니고 -_-;;;

 

 

 

그리고 이번에 왜 이 작품들이 이렇게 나에게 불안하고 기분 나쁜지를 깨달았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관계 위에는 '돈'이나 '권력'과 같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고

그것들은 또 자신만을 위한 이기주의로 치닫아 흐르기 때문에 불편한거였다.

 

심지어 결말이 훈훈하고 유쾌하게 끝나는 그래서 지금 영화화 중이라는

작품 속 첫번째 단편인 '오빠가 돌아왔다'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여기서도 철저하게 파편화된 가족이 나오고 이들은 혈연보다는 돈과 섹스로 얽혀있는 관계다.

돈과 힘을 잃어버린 아버지는,이것을 가지고 있는 오빠에게 더이상 패악을 부리지 못한다.

아마 영화에서는 좀더 밝고 가볍게 진행되겠지만.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전반적인 내용이 크게 무겁지 않고 담백한 문체임에도,

그 뒷맛이 깔끔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라

마치 생선겉껍질을 먹은 뒤처럼, 입술 위에 번들거리는 기름이 그대로 남아

그 비릿한 향과 맛이 하루종일 따라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후. 형사님은 우리 관계 모릅니다. 말해도 모르실 거예요. 진숙이는 그러니까, 옛날부터 우리 셋의 공동소유였단 말입니다. 처음엔 우리도 몰랐죠. 나중에 술 마시다가 알게 됐죠. 아마, 영수 새끼가 먼저 말했을 거에요. 여하튼 그래서 우리 모두 다 알게된 거에요. 비슷한 시기에 모두 진숙이와 잤다는 걸. 남자들은 그런 상황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행동을 합니다. 첫번째 선택은, 모두가 손을 떼는 겁니다. 말하자면 공동경비구역이죠. 하하. 진숙이가 조금만 똑 부러지고 반반했으면 우리는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숙이란 기집애가 좀 띨했다는 거거든요.얼마나 띨했냐면 나랑 처음으로 그걸 할 때도 말이죠, 제 손가락이 들어가는 줄 알고 있었던 애예요. 아무 생각이 없었죠. 그런 애가 어떻게 대학까지 왔는지 모르겠어요. 아, 그리고 두번째 선택은 그 여자가 아예 없었다고, 지금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아무도 화제에 올리지도 않고, 그러나 관계들은 계속되지요. 모두가 함께 만나는 일은 없어야지요. 그 기집애는 말하자면 유령인 셈인데 모두의 눈에 보이는 유령이 있으면 곤란하잖아요. 그렇죠. 이제야 이해를 하시는군요. 그 여자는 없는 것이니까, 그 여자를 공유한다 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질 않아요. 옛날 시골엔 그런 일 많았어요. 어느 마을이나 미친년이 하나씩 있죠. 마을의 칠십 먹은 노인네부터 열댓살짜리 떠꺼머리까지 안 먹은 그런 놈이 없는 그런 년이 있지요. 그래도 마을은 잘만 굴러갑니다.....

 

...그녀가 자신의 십 년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을 때, 영수의 머릿속엔 사실, 이제 이 여자와 잠을 자기는 틀려먹었다는 생각만 떠오르고 있었다. 그 생각은 이런 말이 되어 나왔다. 너 되게 똑독해졌구나. 진숙은 고개를 저었다. 니들은, 내가 바보였다고 생각하지. 그래 맞아. 난 바보였어. 그치만 그러는 니들은 어땠는 줄 알아? 이십대 초반의 너희들은, 기분 나쁘게 듣지 마, 어차피 지나간 얘기잖아, 그래, 음, 똥 마려운 강아지 같았어. 너희들은 남 생각할 여유 같은 건 없었어. 욕망에 허덕대는 스스로를 혐오하느라 다른 누군가를 동정하고 자시고 할 여력ㄷ 없었지. 개폼을 잡고 내 자취방에 기어들어와 십 분 만에 사정하고 도둑놈들처럼 기어나가면서 자기들이 무슨 게릴라나 된 줄을 알고 있었지.....영수는 그 순간 명백히 살의를 품었다. 그랬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걸어다니는 비디오 테이프였다. 그 테이프 속에는 그의 추악한 과거의 악행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녀가 재생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술술술술, 전원이나 배터리 없이도 화면과 음성이 흘러나올 것이다. 그녀가 떠드는 동안 영수의 뇌리엔 살인의 충동이 격렬하게 똬리를 틀었다. ...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온 방 안에 피냄새를 풍겨낼 때, 자신은 준비해온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유유히 방을 빠져나간다. 울컥울컥. 심장에서 피가 솟구칠 때마다 진숙은 꺽꺽거리며 입을 통해 그 피를 토해내는 것이다. 미안해.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고, 애 낳고 집 사고 주말이면 이마트 다니면서 말이야. 한 여자를 공유하던 과거 같은 건 다 잊었다구. 그러니, 넌 좀 사라져줘야겠어....세 남자는 진숙의 출현을 모두 불편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가 일치했다. 그들은 그녀가 완벽하게 사라져주었다고 믿어왔다. 고맙기도 하지. 졸업하자마자 만리타향으로 떠나주다니. 실은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마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게다가 동시에 한자리에 소집된, 그런 우스꽝스런 상황이 그들에겐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랬다. 그들 사이에 '권력'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 권력관계는 명백히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그녀가 그들 셋을 소집하고 모임을 주도했다. 그것은 이렇게 하여 가능해졌다. 그녀는 그들 셋을 낱낱이 알았지만 그들 각자는 다른 두 명의 남자가 진숙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존재했으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어떤 것이 진숙에 의해서 백일하에 현실로 인정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주도권이 진숙에게 넘어간 것도 당연했다. 아마, 말들은 안했지만 그날 진숙을 향해서, 태연히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던 진숙에 대해서 살의를 느끼지 않은 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진숙이 피살되었을 때, 모두 자기 손을 찬찬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김영하, <오빠가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캐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