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소리내어 책 읽기 (295)
언제나 날씨는 맑음
줄을 잘 타서 날치라는 이름이 붙은 전남 담양의 노비출신에서 명창이 된 이날치의 삶을 그려낸 픽션물이다. 문장이나 어휘들이 수려해서 읽는 내내 즐거웠고 평소에 접할 일이 없는 판소리들의 가사들을 음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인물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시피해서 이 구멍들을 메우기 위해 그의 삶 주변에 여러 인물들을 창조해서 엮어놨는데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이라 짜임새 있는 스토리가 되었다. 이청준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미련하고 덧없을지라도 하나의 가치를 묵묵히 추구하는 삶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사랑하는데 비슷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의 몽룡과 방자로 분한 날치와 묵호는 각각 창공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서서 아득하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내 남원에 온 지 오래인데..
콜리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연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시려 눈물이 난다고 말했지만 콜리는 아무리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연재는 꼭 눈이 시리지 않아도 눈이 부시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고 알려줬다. 이를테면 자신이 보았던 하늘 중에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마주치는 순간에. 콜리는 자신의 눈에서도 물이 흐를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일, 투데이가 주로를 완주할 때 눈물을 흘릴 것이다. 투데이를 끌어안고 수고했다고 말해주면서. 잠든 줄 알았던 민주가 콜리에게 말했다. “죽지 않는 한 시간은 영원히 흐르니까, 잠깐 멈추는 거야 문제도 아니지.” “….” “살아 있는 사람의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니까.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고. 너무 빠르게 ..
이건 내가 혹시 기기를 바꾸거나 할 때 새로 기억해야하는 일이 생길까봐 기록 차원에서 적어두는 글. 한 10년쯤 전에 열린책에서 170권 세트를 구매했었다. 플랫폼은 열린책들의 이북 어플을 사용해서 읽는 형태였는데, e컬렉션이라고 해서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세계문학들 시리즈였다. 아마 아이패드 1을 당시에 쓰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때 세트로 구매를 해서 가끔 생각날때마다 보고 있다가, 3년전즈음에 서비스를 교보로 이관하면서 갑자기 교보 샘에서 봐야한다며 아래처럼 메일이 옴.. 더보기 ** pin 번호 등록 후 이용 안내 pin 번호 등록 후에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도서 선택 - sam 버튼 클릭으로 내서재에 도서담기가 가능합니다. ※ 열린책들sam 서비스 바로가기 ◎모바일 : bit.ly/samopenbook..
나는 여행 가서 책을 한 권씩 읽고 오는 버릇이 있는데 덕분에 해당 책들을 볼 때면 그 여행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이번 휴가는 박경리 선생님의 문장들과 내내 동행했다. 김약국의 딸들과 파시는 각각 일제강점기와 6.25 즈음의 통영을 배경으로 인물들의 변화하는 궤적을 그리고 있다. 세차게 부서지는 제주도 바닷가의 포말을 보면서 인물들의 변화하는 인생사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따라갔다. 파시는 수옥과 명화 모두 전쟁 중에 처하게 된 경제적인 상황은 많이 달랐지만 결국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성의 원치않은 애정에 의해서 삶이 뒤틀린다는 점이 마음이 아팠다. 명화는 결국 일본으로 향하게 되는데 차라리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ㅠ “비상 묵고 죽은 자손은 안 지린다더니 정말 그런갑습니다. 그 집 딸을..
속독을 통해 책을 빠르게 많이 읽는 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수능을 잘 칠 수 있나? 사실 그건 속독으로 잘 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중에 나오는 수많은 책을 빠르게, 많이 읽으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되나? 아니면 책이 더 재미있나? 내가 살면서 책에서 얻은 가장 큰 기쁨의 순간들은 좋은 책을 천천히 읽는 시간들에 있었다.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고, 감정에 깊이 공감하고, 타인의 이야기에 위로받고,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고, 작가의 농담에 껄껄 웃고. 이런 순간들을 속독으로도 만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혹시 그렇다면 알려주시라. 솔깃하게 들리면 그 난수표 같은 책도 다시 한 권 사서 천천히 읽어볼지, 누가 알겠는가.
주식, 코인, 선물상품 등으로 인해 도박중독에 빠진 남편의 형제때문에 오랜 시간(10여년 ㅠ)동안 온가족이 고통을 받은 작가의 자전적인 웹툰이다. 솔직히 나라면 벌써 초반에 손절을 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읽으면서 작가분의 인내심과 성숙한 태도에 감탄을 했다. 어릴 때부터 게임이나 복권처럼 운에 뭔가 맡기는걸 안좋아하는 편이라 내용 자체에 평소에 크게 관심을 가질만한 소재는 아니었는데 요즘 도파민네이션을 읽으면서 중독 현상에 관심이 생겼던 차에 겨울서점에서 추천 영상을 보고 읽게 되었다. 읽다 보면서 느낀게 회피 반응과 아주 유사하다는거였는데 자극적인 영상만 찾아봄 - 집중력 저하로 공부 안됨- 공부 안하는 내가 싫어서 또 같은 행동 반복- 악순환;;;
첫날 운동을 마치고 나오니 소감이 어떠냐고 지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주저 없이 답을 보냈다. "개처럼 굴려요." 동물 차별이나 동물 학대에 해당하는 듯한 '개처럼 굴린다'는 말이 '아주 힘들다'는 뜻이 된 건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학창 시절 본 스웨덴 영화 에서 ‘개 같은’이라는 말은 ‘아주 좋고 부러워할 만한’이란 뜻이라 해서 문화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한국에서 ‘개 같은’의 의미는 정반대로 문명 속에서 살아감에도 인간답지 못한 삶을 강요당하고 자연 속 네 발 짐승처럼 구는 비인간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던가. 나이가 40에 가까워지면서 스스로 운동에 대해 갖는 마음과 목표가 많이 달라졌는데, 운동에서 중량을 늘리거나 몸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수치상의 목표보다는 신체의..
체성분 검사지를 가지고 상담할 때 나는 늘 숫자보다 전체적인 비율과 현재 몸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권한다. 숫자에 얽매이다 보면 정말로 중요한 '스스로 판단하는 몸의 느낌'을 놓칠 수 있다. (..)결국 지금까지 익숙하고 편했던 최소한의 신체 활동을 넘어 다양한 움직임을 시도하고 경험해 보아야 진정한 자기 몸을 알게 된다. '늙음은 추하다. 통증은 늙어서 생긴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지는 사회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쪽은? 미용, 건강 관련 기업과 환자의 공포로 돈을 버는 비양심적 병원들일 것이다. '나이 듦'은 통제할 수 없고 추하다는 그릇된 메시지에 압도되어 무기력해지지 말고 내 몸의 역사와 특징부터 찬찬히 돌아보자. 그 특별한 역사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
약쟁이의 핑계일지도 모르겠으나 이 모든 게 애정에서 비롯되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은 성취욕으로 변모해 있다. 그는 이 세계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운명을 직감하면서 무엇이든 움켜쥐고자 한다. 애정과 성취욕이 어떻게 뒤섞여서 하나가 되어버린 건지 태이는 잘 모른다. 애정이 분노와 슬픔으로 뒤바뀌는 것을, 박탈감으로 변모하는 것을, 자기 혐오가 되어 온몸을 두드리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애정이 육상 세계에 입성하기 위한 입장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입장권만으로는 그 세계를 즐길 수 없어서 자꾸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가진 돈이 없는 줄도 모르고, 그 돈이 전부 빚이 된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렇게 했다.
sf소설이지만 가장 인간적인 소설집이었다. 관내분실을 읽고 나서 작가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추가로 읽어본 책. 관내분실을 포함한 sf 단편집들이 실려 있었다. 완벽한 유전자 조합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게 되었지만 결국 자신의 치명적인 단점을 그대로 가진 인간을 만들고, 그런 단점들이 포용될 수 있는 사회를 꿈꾼 과학자. 그리고 사랑의 감정 때문에, 이상적인 사회를 버리고 다시 지옥이 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기술의 발전에 이바지 했지만, 결국 그 기술의 발전때문에 가족과 생이별하며 살게 된 과학자의 이야기. 그녀는 끝을 알고 있지만 무모하게도 가족을 향한 여행을 시작한다. 하나하나의 문장이 아름답고 울림이 있다기 보다는 굉장히 담담하고 담백한 느낌의 소설이지만 전하려는 메세지들이 따뜻하고 ..
책을 읽어도 길게 기록하는게 부담스러워서 일기에 간단하게만 적거나 했는데 이러니 나중에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생겨서 이 게시판에 써보려한다. 자기 전에 가볍게 시작했다가 끊지못하고 한번에 쭉 읽어내려간 소설이다. 스릴러물을 많이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그 이유가 자극적인 장면들로 흥미위주로만 풀거나 허술한 내용을 반전으로만 메꾸는 식이 많아서이다. 재밌게 읽었어도, 이후에도 이 책을 소장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은 각 인물들에 대한 심리 묘사가 디테일하고 플롯이 촘촘한 편이라 즐겁게 읽었다. 개인적으로 결말은 이렇게까지 ?.의 느낌이긴 했는데 완벽주의를 추구하던 사람이면 그럴 것 같기도 해서 아예 납득이 안가지는 않았다. 특히 산부인과 검진이나 출산처럼 삶의 장..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흔히 애증이 얽힌 사이로 표현된다. 예컨대 딸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의 삶을 재현하기를 거부하는 딸.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앓는 딸과 딸에 대한 애정을 그릇된 방향으로 표현하는 엄마. 여성으로 사는 삶을 공유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다른 세대를 살아야 하는 모녀 사이에는 다른 관계에는 없는 묘한 감정이 있다. 대개는 그렇다. 한때는, 지민도 엄마와 자신 사이에 그런 애착과 복잡미묘한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았다. 스무 살의 엄마, 세계 한가운데에 있었을 엄마,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이었을 엄마. 인덱스를 가진 엄마. 쏟아지는 조명 속에서 춤을 추고, 선과 선 사이에 존재하는, 이름과 목소리와 형상을 가진 엄마. 지민은 엄마를 상상했다. 어쩌면 ..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어.같이 사는 것만 빼고. 기왕에 결혼 안 한 보호자로는 애인보다 친구가 낫다. 내가 여자여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밤늦게 헤어질 때 택시의 차량번호를 적어두고, 잘 들어갔는지 확인 전화를 해주는 것은 항상 여자들이다. 회식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도망 나온 날, 길거리에서 '바바리맨'을 만나 심장이 무릎까지 떨어진 날, 밤늦게 현관 문고리를 흔들다 사라진 의문의 행인 때문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잠든 날, 달려와 함께 있어주겠다고 말한 것도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애초에 그런 종류의 공포를 이해하게끔 길러진 생물이 아닌 것이다. 생명과 안전을 제외하고도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여자 친구들이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유용한 존재들이다. 이사할 때 짐 정리를 도..
올해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페미니즘.덕분에 오빠나 주변 사람과도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었고 출판계에서도 흐름을 잘 반영해준 덕분에 좋은 책들을 참 많이 봤다. 중고로 내놨을 때 가장 먼저 팔린 책들도 예전에 사놨던 여성학 책들이었는데, 내가 샀을 당시에는 인기목록에도 들지 못했던 서적들이라 너무 신기했음 기록을 남겨야지 했다가 그냥 지나쳐버린 괜찮은 책들이 몇 권 있는데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레베카 솔닛 : 맨스플레인...진짜 한심하고 촌스러우니 제발 하지 말자 좀;; '악어 프로젝트'-토마 마티외: 성교육을 했으면 이런 정도로는 해줬으면 좋겠다. 성추행이나 성폭행 피해자들을 대하는 논리가 정말-_-그래픽노블 형식이라 매우 직관적임. 강추한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스테..
바스티앙 비베스의 작품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소소하고 그냥 스나치기 쉬운 감정들을 그림으로 솔직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해는데 탁월한 작가다. 간단한 그림과 상황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을 설레고 아프게 할 수 있구나..
좋아하는 두 시인이 만났다. 백석 그리고 안도현 두 사람을 연결지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평전을 펼치면서 나란히 쓰여진 두 사람의 이름을 놓고 보니 나즈넉하고 정감 넘치는 시풍이 참 비슷하다 싶기도 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철길 양쪽으로 펼쳐진 빈 들판에 기러기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 잠자리로 돌아가려는 기러기들이었다. 기러기들은 여럿이 떼를 지어 날았지만 백석은 혼자였다. 그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통영 처녀 박경련도 없었고, 경성에서 마지막으로 본 자야도 없었다. 최정희도 노천명도 없었다. 평양에서 결혼을 하고 안동과 신의주에서 잠시 같이 살았던 문경옥도 없었다. 평양에서 결혼을 하고 안동과 신..
김영하의 소설을 리뷰한 적이 있었나 싶은데...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즐겨 듣고, 소설 역시 대부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건 이 작가의 소설에 대한 감탄이라기 보다는 우연에 가깝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난 그의 소설에 대한 호감보다 그의 목소리와 팟캐스트 대한 애정이 더 높았을 것이다. 이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가독성이 좋고 빠르게 읽힌다는 것 그리고 매회 소설의 아이디어가 매우 좋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같은 초기작부터 최근의 '살인자의 기억법'까지 제목을 빼내는 솜씨도 그렇고 플롯을 구성하는 기획력 역시 대중들의 흥미를 잘 끌어낼만하기 때문에 순수작가와 대중작가로서의 선을 영리하게 잘 넘나든다는 느낌이다. 김훈 작가가 화려하고 만연체의 진중한 남성성을 매력으로 내세운다면 ..
우석훈의 다른 책들처럼 아주 깔끔하고 쉽게 읽힌다. 그리고 그가 쓴 다른 책들에 비해서 보다 실용적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상품에 투자하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알려주는 경제실용서적이나 재태크 서적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들이 미래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고민이 될 때 참고를 하면 좋을만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경제서적을 꽤 많이 읽었는데, 그중 가장 인문서적에 가까운 책이었지만 커다란 틀을 잡고 생각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속으로 생각하던 것일지라도 누군가의 책을 통해 재확인을 하면 좀더 안심이 되는 법이니까. 재테크, 부동산, 회사, 귀농, 창업 등 30대라면 한번쯤은 고민해볼만한 문제들을 사회전반적으로 모두 다뤄주고 있어서 매우 좋았는데, 진지하면서도 실용적인 고민들을..
영화로 상영되면서 꽤 인기를 끌었던 소설 근래 읽었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재밌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서평에 '아르토 파실린나'를 비교해 놓은 것을 보고. 아! 하고 무릎을 쳤는데 정말 '기발한 자살 여행'에서 느꼈던 그 블랙코미디 속에서 흐르던 기지와 유쾌한 기운이 똑 닮아있다.:-) 이 책이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이야기를 짜는 솜씨나 넉살스럽게 허풍을 치는 실력이 아주 탁월해서 작가의 이력을 보니 역시 15년간 기자로 일한 언론인 출신이었다. 역사적인 사실과 허구적인 인물들을 섞어서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읽는 내내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을 읽는 듯한 허무맹랑함에 웃음이 나면서도 실존인물들을 묘하게 껴맞추는 솜씨에 감탄이 나왔다. 그가 좀 더 일찍 결정을 내려 남자답게 그 결정..
커트 보네거트의 대표작인 이 책은, 잡지에 연재했었던 글들을 모아둔 것이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독설은 꽤 직설적이고 강도가 센 편이라 왜 사람들이 마크 트웨인 이후의 최고의 독설가로 그를 뽑는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커트 보네거트의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나라 없는 사람'을 꼽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비판 대상은 누구나 알만한 정치적인 인물들이나 사건이기 때문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시리즈보다 좀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의 두께는 아주 얇은 편이라 1, 2시간 내외면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책이 가지고 있는 무게나 매력은 꽤 있어서, 다시 돌아가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각 장의 맨 앞에는 아래 이미지 같은 실크 스크린 작품이 있었는데 푸른 바..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요네하라 마리. 그녀의 글은 언제나 소재가 풍부하고 묘하게 이국적인 느낌이다. 외국 작가니 이국적인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통 이국적이라고 한다면 보통 남태평양의 어느 해안이나 유럽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녀의 이국성은 러시아. 그것도 해체 이전의 공산주의 국가에 적을 두고 있다. 아버지가 공산주의 관련 언론기관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녀 역시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는데 이념문제는 차지하더라도, 당시의 실생활을 엿볼 수 있어서 매우 흥미롭다. 특히 교육학 시간에도 주로 서방의 시스템을 다루기 때문에 저 당시의 수업방식을 알 수가 없었는데, 개인적으로 참 인상깊었다. 토론식 수업을 유도한다거나, 외모에 대한 지적을 금기시한다건 등등. 이 책은 그녀가..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한강의 신작 '소년이 온다'는 사실 세월호 사건 이후에 마음이 너무 뒤숭숭해서 차마 손이 가지 않던 책이었다. 그래서 신간이 나오는 대로 구입하는 작가임에도 몇달이 지나서야 사게 된 책. 사실 책을 사게 된 과정도, 서점에서 잠시 약속시간을 보내려고 집어들었다가, 눈물자국이 여기저기 찍힌 책을 그대로 내 책장에 꽂게 되었다. 한강 작가의 문체가 굉장히 건조한 편이라, 그녀의 소설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읽는 순간순간 그 건조함에 더 울컥하고 마음이 아팠다. 이전 작품에 비해 스토리라인이 뚜렷한 편이라 훨씬 빠르게 읽혔고 대화 중간중간 의도적인 호흡 조절이 느껴져서 감정이입이 쉬웠다. 이 소설은 광주민주화 운동을 둘러싼..
이번 여름의 초입에 정유정의 28과 관련된 팟캐스트를 들었는데 그녀의 소설에서 느꼈던 치밀하고 단단한 느낌과는 다르게 서글서글하고 유쾌한 입담에 길을 걷는 내내 즐거웠었다. 간호사로 오랜 기간 일을 하고 한 사람의 아내로. 엄마로 지내면서 꾸준히 글쓰기를 하고 늦게 문단에 발을 내딛은 작가. 사회생활와 가정생활을 일반적인 사람들만큼 경험해본 작가여서 그런지 일반적인 작가들의 인터뷰보다 보다 소통적이고 개방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다. 사실 28은 우연찮게도 영화 감기와 내용이 너무 비슷한지라 영화에서 지레 질려버려서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작가의 인터뷰덕에 읽어내려갔던 소설이다. 7년의 밤에서 느꼈던 이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은 공간을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는데 장미의 이름을 쓰면서 수도원..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정암학당의 고전어 강좌에 대한 공지를 읽었을 때였다. '뤼시스'와 '향연' 등을 번역한 전문연구가와 함께 하는 희랍어문법.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 들을 중심으로 강독을 병행한다고 했다. 언어에 대한 실리적인 습득.이라기 보다는 좀더 폭넓고 철학적인 강독에 가까워보이는 저 공지글을 읽으면서 문득 잊고 있었던 한강의 소설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책을 읽기 위해 아무리 이쪽 저쪽 책들을 뒤져보아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구매목록을 뒤져보니 의외로 산 흔적이 없어서 급하게 주문을 했다. 한강님의 소설을 참 좋아하지만 읽는 사이에 필요로 하는 에너지가 다른 작가들이 비해 좀 큰 편이었고 읽은 후에도 한동안 숨을 고르게 하는 시간이 꽤 오래 소요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어떤 일을 ..
6개의 단편소설을 묶은 정미경의 단편집. 제목부터 너덜너덜한 살덩어리 피비린내가 진동하듯이, 읽은 뒤에 긍정적이거나 희망찬 기분을 전달해주는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삶의 균열과 외면하고 싶을 거북한 풍경을 하나하나 까발려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각자 다른 계기로 이상징후를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이 사실은 '거짓'이었음을 느낀다. 동화와는 달리, 삶에서 우리가 매순간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삶을 뒤집겠다는 큰 용기를 내지 않는 이상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용기를 내지 못한 채, 누더기가 된 인생일지언정 껴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평범한 우리들처럼 속물적이고, 겁이 많은 그런 사람들이다. 읽는 내내 ..
2011년에 출판되어서 단번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정유정의 장편소설. 아마 그 해 가장 핫한 소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해 입소문으로 책이 재밌다는 이야기가 알음알음 퍼져나갈 당시에 일찌감치 서재에 꽂아놨었고, 누군가에겐 선물도 했지만 막상 나는 어쩐지 책에 손에 가지 않아서 그냥 방치 중이었다. 난 영화든 소설이든, 그것이 화제의 대상이 되면 오히려 손이 잘 안가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데 덕분에 대박을 친 흥행작은 보려고 했다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경지에 이르면 계속 기피하다가 평이 여전히 좋으면 그때서야 끄트머리에 겨우 보게되곤 한다. 결국 이 소설도 정유정의 새로운 신작 28이 나온지 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펼치게 됐다. 한밤중에 김기덕의 피에타를 보다가,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더는 보질 못하..
아나운서 김지은 씨는 미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뒤늦게 예술학을 전공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녀가 쓴 '서늘한 미인'을 보고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책도 서늘한 미인과 함께 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다 읽는 것이 아까워서 미뤄두다가 연말에야 끝을 보았다. 이 책에서는 한국의 잠재력 있는 미술가들을 다루고 있었는데, 전문적인 미술사학책처럼 이론적인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개인의 철학이나 작품활동들을 깊이 있게 풀어내서 흥미로웠다. '예술가의 방'은 서늘한 미인의 후속작에 해당하는 격의 책으로 현대미술작가 10인이 작업실을 방문하고 그들과 인터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2007년에 있었던 인터뷰들이라 그 화가들의 작업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는..
한국어 제목 때문에 화성남자, 금성여자처럼 연애개론서 비슷하게 생각될 것 같은데 사실은 두 신경과학자가 공저로 작성한 킨제이 보고서에 더 가까운 책이다. 때문에 단순히 연애나 성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읽을거라면. 다른 책을 찾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책은 전세계 50만명의 남녀가 검색한 10억건의 웹 검색내용, 수십만권의 에로소설, 500만건의 성인용 구인광고, 수천편의 디지털로맨스 소설과 포르노, 4만개 이상의 성인 사이트를 과학적,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다. 학술적인 설문지나 면대면 조사에서보다는 혼자 인터넷에 검색을 하거나 동영상을 찾아볼 때 자신의 욕망이 보다 솔직하게 드러날 것이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검열없이 표현한 성적욕망의 패턴에 대해 알 수 있다. 꽤 재밌는 내용이 많았는데, 이를테면 동..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섞여 있는 단편소설집. 작가의 말 중에, 문예창작과 재학 시절 '기본기'가 덜 되어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학생 때부터 우연과 필연을 잘 조합해 스토리를 기승전결로 이끌어나가는 소설의 구성을 싫어했었나 보다, 이 소설들 역시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분간이 안가는 지점들이 여러군데 나오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그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고 묘한 장점으로 다가온다. 성석제님의 소설과 연달아 읽어 은연 중에 비교가 되었는데, 성석제의 소설이 아저씨 특유의 넉살과 여유가 느껴진다면 이기호의 소설은 좀더 생동감 넘치고 캐쥬얼한 느낌이다. 둘다 적당히 찌질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진다는 매력은 공통점.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작품은 '원주통신' 사실 이 책을 사서 읽게 된 ..
몰두 개의 몸에 기생하는 진드기가 있다. 미친 듯이 제 몸을 긁어대는 개를 붙잡아서 털 속을 헤쳐보라. 진드기는 머리를 개의 연한 살에 박고 피를 빨아먹고 산다. 머리와 가슴이 붙어 있는데 어디까지가 배인지 꼬리인지도 분명치 않다. 수컷의 몸길이는 2.9밀리미터, 암컷은 7.5밀리미터쯤으로 핀셋으로 살살 집어내지 않으면 몸이 끊어져버린다. 한번 박은 진드기의 머리는 돌아나올 줄 모른다. 죽어도 안으로 파고들다가 죽는다. 나는 그 광격을 '몰두(沒頭)'라고 부르려 한다. 소설. 이라고 하지만 어떤 스토리나 뚜렷한 갈등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 작은 소품집 느낌의 책이다. 난 성석제의 글을 읽다 보면 항상 담백한 국수면발을 먹고 싶어진다. 특유의 너스레함과 아저씨스러운 털털함 때문일까.. 문장의 길이가 그리 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