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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찾아서- 조경란

DidISay 2012. 1. 22. 14:56

 


그가 전화를 해주었으면, 하고 기다릴 때가 있다.

나의 코끼리 이야기를 이해해주고 귀 기울이는 사람은

그밖에 없으니까.

나는 수화기를 붙잡고 코끼리 얘기만 갖고도

한 시간쯤은 수다를 떨 수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래도 보이는 게 있다.

이따금씩 집이 꿈틀, 움직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아, 코끼리가 왔구나, 짐짓 생각하는 것이다.

 

 

 

방금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땐

그냥 무덤덤하더라.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토록 설움이 북받치는 것이지.

 

 

 

나무를 베는 일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아주 계획직인 일입니다.

우리들은 돌아오는 겨울이나 새 봄에 죽어야 할 나무들을 골라

동력 톱으로 껍질을 벗겨놓습니다.

미리 표시를 해두는 거지요.

멀리서 보면 표시를 해둔 나무들은

마치 흰띠를 두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난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껍질을 벗겨놓은 나무들은 모두 마지막으로 꽃을 피울 때

그 어느 때보다 특별히 많은 씨앗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무들은 제가 죽을 때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은 껍질을 벗겨놓은 나무들이 있는

계곡 맞은편의 나무들은 껍질을 벗겨놓지도 않았는데도

엇비슷한 시기에 유독 많은 꽆과 씨앗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숲에서 번개 때문에 산불이 난 건 그 다음해 봄이었습니다.

아직 벌목을 시작도 하기 전이었어요.

처음에 난 뭐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맞은편 계곡의 나무들 역시

자신들이 죽을 때를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으로 죽을힘을 다해

꽃과 열매와 씨앗을 힘껏 맺어놓았던 거였어요.

그게 자연의 자기 보존 기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나는 벌목할 생각도 못한 채

일꾼들 사이를 빠져나와 숲속을 마구 헤매고 다녔습니다.

뭔가 또 내가 발견하지 못한 사실들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아니, 난 사실 무서웠던 건지도 모릅니다.

계곡을 벗어나 한참을 걸었어요.

그런데 그 계곡을 중심으로 5킬로미터 반경의 나무들 모두

같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먼 곳에서 죽어가는 나무들이 어떤 물질을 분비하고

바람에 의해 그 물질이 다른 나무들에 가 닿아서

신호를 주고받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한 건 한참 후였습니다.

내가 놀란 건 그 사실보단 표시를 해놓은 나무들이

이미 죽을 때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난히 탐스런 꽃과 열매와 씨앗들……

사람도, 난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무들이 내게 복수를 하여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기 시작할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 있었습니다.

숲은 기억력이 아주 좋아요.

특히 복수를 할 때는 말입니다.

 

 

 

그 남자는, 아마 영원히 죽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그를 기억하고 있는 한,

당신이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도 당신을 떠올리고 있을 거에요.

 

 

 

지금쯤 그는 한 나루의 나무가 되었다는 것을.

보내지 못한 편지를 평생 간직한 사람처럼

그는 한 그루의 뜨거운 수신 나무나

송신 나무가 되었다는 것을.

 

 

 

얘, 윤슬아, 병하라는 청년은 죽지 않았다.

네가 부르면 그는 네 목소리를 알아듣곤

곧장 심장을 쿵쿵거리며 네게로 올 거란다.

나의 그가 그러했듯이, 나의 나무가 그러했듯이.

 

 

 

먼 나라에서는 양을 낳는 나무도 있었으며

열매 대신 흰 거위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후내내 나는 혼자 이 집에 있었다

어제도 이 집엔 나 혼자뿐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내일도 이집엔

나밖에 없을것이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새

그는 이미 나와 헤어져 있었다

 

 

 

한번 떠난 사람은 다시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단다.

슬픈건 헤어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다시 돌아왔을때

우리가 그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거란다.

 

 

 

누구도 자신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 쉴 수는 없는 법이다.

내 그늘 속에는 다른 사람만이 와서 쉴 수 있는 것처럼.

나는 그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야생 동물들의 삶에서 단 한 번의 실패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한 번의 실패, 그것은 곧바로 죽음을 뜻한다고 하다군요.

그건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겠다는 단단한 금 같은 것 말이다

 

 

 

 

진정으로 간절한 것은 오래 지속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처음처럼 견디지는 못한다.

변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변해야 한다.

사랑은 그렇게 자라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