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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무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1968)

DidISay 2012. 6. 1. 13:21

 

  센스 있는 포스터. 지금 나오는 어지간한 것들 보다 깔끔하고 임팩트 있다!  ^^ 이 작품은 시계태엽오렌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더불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미래3부작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감독 특유의 완벽주의 때문에 예상보다 두배 이상 길어진 제작기간과 제작비 그리고 감탄할만큼 세세한 디테일을 자랑한다.

  실제로 외계인이 나타나면 리얼리티가 깨져 망할까봐-_-; 추가로 플롯을 구성하고 보험까지 들려고 했던 큐브릭 감독의 집착은 워낙 유명해서, 배우들이나 스탭들이 엄청 힘들었을게 눈에 선하다. '미래형 화장실의 수칙 10계조' 같은 쓸데 없는 고퀄이라든가, 무중력상태의 우주선을 거의 완벽하리만큼 구연한 것 등은 감탄을 자아내는 >_< (제임스 카메론이 왜 이게 잘못됐는지 화내면서 재촬영을 하는 스타일이라면, 큐브릭 감독은 온화하게 웃으면서 그냥 무작정 다시 하자고 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덕분에 아주 작은 소품들도 굉장히 여러번 교체했고..일단 결과물이 워낙 좋으니 이유를 몰라도 다들 그냥 따른듯) 



  니체 빠돌이었던 스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장엄한 선율과 70밀리 와일드 스크린의 조합으로 광활하고 신비한 우주 이미지를 잘 구현해냈다. 게다가 소품하나하나가 도저히 그 시대에 만들었다기 믿기 어려울만큼 세련되서 요즘에 봐도 크게 촌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큐브릭은 영화의 기술 관련 조언을 담당했던 프레데릭 오드웨이에게  “(제목)'2001'은 ‘two thousand and one이라고 읽어야 하나요? 아니면 두 자리씩 끊어서 ’twenty oh one’이라고 읽어야 하나요?”라고 질문했다는데 -_-; ‘two thousand and one'로 읽기로 결정했단다..이런 세세한 집착이라니 ;;)

   큐브릭의 천재성은 '대단히 많은 것을 보여준 데 있는 게 아니라 상당히 조금만 보여준 데 있다'는 말처럼, 이 영화는 주제가 뚜렷하다거나 스토리가 명확한 작품이 아니다. 때문에 수많은 해석이 터져나오고 있는데 기술문명에 대한 썰은 워낙 많은데다가 이 시점에 와서는 진부한 면도 있어서 패스하려고 한다.

  일단 내가 주목한건, 이 작품이 서양 중세문학에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성배 이야기와 유사한 구조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직사각형의 검은 돌- 모노리스-로 인한 인류의 도구 발견 그리고 이후 우주선까지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문을 연다. 성배가 인간의 아귀다툼의 원인이었듯이, 레퀴엠의 음험한 선율과 함께 등장한 모노리스도 시작부터 인류의 폭력성을 여지없이 표출시킨다. 이후 모노리스는 목성탐사를 위한 계기가 되면서, 이 영화의 핵심적인 소재로 자리매김한다. (사실은 나무로 만들어졌던 모노리스를 지문하나 없이 매끈한 석판으로 보이게 하려고, 몇차례나 재제작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큐브릭이 촬영 시에 옮길 때마다 작은 흠 하나 없는 상태를 요구해 스탭들이 엄청나게 고생했다는 후문이;;)

   주인공들과 함께 목성탐사를 시작한 HAL은 인공지능컴퓨터이면서도 후반에 마치 니체의 실존주의라도 깨달은 듯이 스스로 우주를 탐사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그저 기계로만 인식하는 인간들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인간이 가장 믿을만한 기계를 창조하기 위해 준 자유의지가 결국은 배반으로 돌아온 것이다. 기계입장에서 보면 모순되는 임무와 자유의지를 줘놓고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인간이 어처구니 없을지도;;; 후반부에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할은 좀 불쌍하기까지 하다;

  의기양양하게 세상의 주인으로 행사하는 인간이지만,  후반에 할의 배신으로 이를 제거하려고 할 때 무중력상태에서 들려주는 나약하고 끊어질듯한 거친 호흡은 꽤 인상적이었다. 또 완벽한 존재로 보였던 할이 사실은 기계부품 몇개만 빼면 점점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도 그랬고..


  영화 뒷부분에서 모노리스는 서판으로 변하는데, 이런 서판이나 책은 성배와 관련된 이야기가 담긴 책을 나타내는 것으로 성배의 한 변형된 형태라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은 '목성, 그리고 무한의 너머'라는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화려한 우주의 이미지가 정점에 이루는 어지러운 화면을 지나 갑자기 화사한 프랑스 바로크풍의 방이 등장한다.

  우주선이 방에 도착하고 조종사는 바깥의 남자들을 바라본다. 자신의 미래를 계속해서 보고 있는 것이다.  식사를 하는 노인-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으로 계전환이 되는 과정을 거쳐, 어느순간 그 사내는 자신이 되어 조금씩 늙어간다. 그렇게 죽음에 이르던 조종사는 최종의 순간에 검은 비석을 마주하게 된다. 조종사가 비석을 향해 손을 뻗고 그 순간 관객들은 우주를 유영하며 지구로 향하는 한 아기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한 요소들, 즉 잘 차려진 식탁과 병든 노인은 성배 이야기에 나오는 어부왕 및 그와의 식사를 나타낸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노인 앞에 검은 돌이 다시 나타나는데, 성배 이야기에서 성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생을 얻듯이, 노인이 검은 돌을 응시하자 태아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건 뭐 유인원과 인간이 레벨업 할 때마다 모노리스가 등장하는;;



  
  왜 하필이면 미래를 묘사하면서 중세의 성배구조를 사용하고 바로크풍으로 꾸며진 방을 사용했을까 싶은데, 일단은 근대화가 극에 달한 미래를 오히려 과거 회귀적인 모티프를 사용해 묘사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할이 죽어가면서 부른 노래가 촌스럽기짝이 없는 '데이지'인 것도 재밌고. 미래를 묘사할만한 능력이 부족했다고 하기엔, 기존의 비행접시 형태를 벗어난 우주선을 고안한 것이나 우주선 내부를 감각있게 창조해낸 큐브릭의 감성이 너무 뛰어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그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세 단계로 묘사했다.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가 그것이다.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 크게 고무되었지만 종의 진화라는 관점, 곧 하나의 종으로서 다수의 인간 무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아무런 목표점 없이 진화한다는 다윈의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진화는 선택된 개인의 진화였고 그 목표는 인간의 자기극복으로서의 초인(Uebermensch)이어야 했다. 그 초인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 것이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 정신의 세 단계 변화다. 

   만약 인간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할의 상태가 낙타였다면, 자유를 쟁취해내려고 하는 후반부의 할은 사자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과정을 모두 겪은 인간이 바로 스타차일드. 어린이일 것이다. 매 순간을 마치 유희하듯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후회없는 시간을 보내는 아이. 아이에게는 결핍이 없으므로, 도구에 대한 욕망도 폭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근원에 다다르기 위해 긴 여정을 통과한 오디세우스나, 도구 발전의 극대화나 그 폐해를 모두 겪고 다시 아기로 돌아간 스타 차일드는 꽤 비슷한 면이 있다.  

  할은 자유를 쟁취하려는 과정에서 강박증에 사로잡히고, 결국 인간에게 제거 당하고 말았다. 다시 태아로 돌아간 인간은 과연 순탄하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낼 수 있을까.

 

 

덧) 1. 큐브릭은 작가 클라크에게 ‘영화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공동 각본 작업 방식을 제안했는데, 공동으로 영상화가 가능한 소설을 집필한 후 그 소설을 바탕으로 각본을 짜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남성 'HAL'인데, 수많은 리뷰에서 알려진 것처럼 지옥이나 IBM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냥  “클라크와 나는 heuristic과 algorithmic에서 각각 앞 글자를 따와” 지은 것이다 -_-;;

   영화가 개봉한 후, 일부 ‘앞서가는(?) 관객’들은 ‘HAL이 IBM의 알파벳 앞 글자들의 조합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영화가 (당시 한창 잘 나가던) IBM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라는 해석을 내 놓았다. 큐브릭과 클라크는 이 엉뚱한(?) 해석을 접한 뒤 크게 당황했고, 클라크는 꽤 오랫동안 이에 대한 해명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2001: The Making of a Myth"에서 클라크는 여기에 대해 확실하게 ‘아니다’라고 못을 박는다. 한편 그는 이 다큐에서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에 대해 해명을 하는 것을 중단한’ 이유를 이렇게 장난스럽게(?) 밝히기도 했다. ㅎㅎ


 

 

2. 영화가 시작되면 우주의 생성을 예고하듯 3분여 동안 암흑만을 보여준다. 처음에 뭔가 잘못된 줄 알았던;;; =ㅁ= 그 뒤에 이어지는 장면이 달과 해와 지구가 일직선으로 놓이며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가 울려퍼지는 것. 그래서 이 작품은 처음과 시작의 ost가 굉장히 인상깊게 남는다. 더불어 이 작품의 공식적인 첫 대사는 거의 25분이 지나서야 나오고 중간에 검은화면이 길게 나오는 쉬는 시간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