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멜랑콜리아(Melancholia,2011) 본문
오랜만에 무슨 영화를 볼까 하다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를 봤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미 화제가 됐었고, 독특한 오프닝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꼭 보고 싶었던 영화.
이 영화는 칸영화제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던 '트리 오브 라이프'와 여러모로 비교가 되는데 특히 두 작품 모두 잘 짜여진 이미지의 향연을 보여준다. '트리 오브 라이프'가 생명체의 탄생에 대한 웅장한 영상을 보여준다면, '멜랑콜리아'는 종말에 대한 은유로 넘쳐난다.
또한 말러, 브람스, 스메타나, 바흐 등의 클래식 음악을 영리하게 사용했던 '트리 오브 라이프'처럼 멜랑콜리아도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작품 전체를 압도한다.'트리스탄코드'라고 불리는 바그너의 G# 주도의 반음계적 화성진행으로 영화 내내 무겁고 하강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큰 몫을 차지한다. 영화를 모두 보고 나면 오프닝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데, 초반 10분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는 마치 문학작품처럼 곳곳에 은유가 숨겨져 있어서,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그림들과 영화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 있어서, 아는만큼 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덕분에 아주 회화적인 영화가 탄생한. :) 커스틴 던스틴의 말처럼 '매우 시적인 영화'이다. 영상 하나하나가 매우 아름다워서, 특히 세개의 달이 떠있는 장면은 마치 1Q84에 묘사된 장면을 화면으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일단 포스터의 이미지부터 '도그빌'처럼 존 에버릿 밀러의 '오필리아'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상실감과 우울의 이미지 그 자체. 우울을 상징하는 저스틴의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또 오프닝에 사용되었던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
마을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는 와중에 빈 손으로 돌아오고 있는 사냥꾼을 그린 브뤼겔의 그림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잿더미로 타버리는데, 사회와 고립되어 있는 이 영화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이 영화는 1부 저스틴(우울)과 2부 클레어(불안)으로 나뉜다. 두 자매의 정신병리학적인 증세가,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흔들림과 압도적인 스케일과 더불어 관객들을 매우 지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이다. 저스틴의 우울함과 감정전 그리고 짜증나는 주변인물들의 상황은 관객들을 꽤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딸의 결혼식에 와서 대놓고 결혼제도가 싫다고 말하는 냉정한 엄마, 은수저 하나라도 챙기려고 하면서, 딸의 고민은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아버지, 결혼식에서까지 광고카피를 완성하라면 들들 볶는 직장상사, 어줍잖은 과학지식에 돈 밖에 모르는 형부..
카라바지오의 '골리앗 머리를 든 다비드'는 저스틴이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주변인물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주변에 북적거리나 소통할 수는 없는 그들. 실제로 베어내지는 못하니, 저스틴은 그저 온갖 기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이를 대신하고 결국 결혼식은 망쳐지며 결혼식에 초대되었던 모든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결국 화려하고 완벽하게 시작되었던 결혼식은 사라지며, 따뜻한 골드톤과 빛으로 화면만이라도 따뜻했던 1부는 끝나고, 건조하고 서늘한 푸른빛으로 가득찬 2부가 시작된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저택도 횡하니 비어, 굉장히 정적이고 고립된 느낌이다.
2부에서는 행성 멜랑콜리아에 대해 직감적인 불안을 가지는 저스틴의 언니, 샬롯 갱스부르가 연기한 클레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1부나 2부나 전개과정은 인과관계가 뚜렷하지도 않고, 그저 무심하게 보여줄 뿐이라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클레어는 남편의 이성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충돌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떨치질 못한다. 우습게도 극도의 우울함과 불안증세로 물에도 들어가지 못하던 저스틴이 오히려 종말이 가까워오자 이에 대해 담담하게 수용하고 오히려 즐기는 자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위기상황에 직면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클레어는 종말이 확실시 되자 두려움에 떨며 최대한 벗어나려 하고, 지금까지 이성과 과학에 기대던 형부는 종말을 직면할 자신이 없어 자살한다. 그런 점에서 마치 멜랑콜리아와 사랑을 나누듯, 알몸으로 달빛을 마주하는 저스틴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푸코에 의하면 근대이전 소위 '미친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기이한 존재이긴 했지만,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도맡았기 때문에 가두거나 약물치료를 해야하는 존재가 아닌 오히려 두려움의 존재였다. 이 작품을 보는데, 거의 정상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병약해진 저스틴이, 유리병 속에 든 콩의 알을 정확하게 맞추고 종말이 가까워오자 의연한 태도를 보이고 언니와 조카를 위로하고 챙기는 모습에서 저런 사실이 떠올랐다.
강철소녀라는 극중 별명처럼, 정말 강한 것은 가장 나약해보였던 저스틴.
마법의 동굴이라 이름붙인 나무틀이 거대하게 충돌해오는 행성에 비해 너무나도 허약해보여서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가 신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어려움만 준다고 했지만, 가끔 정말 힘든 일이 나에게 다가올 때는 그것이 나를 압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감독이 단언한 것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종말의 순간. 끝나는 순간 이렇게 숨이 막히면서 온 몸의 진을 빼는 영화는 또 처음이었다. 기승전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그런 느낌.
멜랑콜리아는 실직, 실연, 누군가의 죽음, 혹은 나의 삶을 뒤흔드는 그 어떤 어려움일 수도 있다. 내 삶의 끝과 같은 그 어려움을 나는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 수 있을까?
'그들 각자의 무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 1964) (0) | 2012.06.02 |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1968) (0) | 2012.06.01 |
어벤져스 (The Avengers, 2012) (0) | 2012.05.21 |
거짓말의 발명(The Invention of Lying.2009) (0) | 2012.05.21 |
디센던트 (The Descendants,2011) (0) | 2012.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