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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다이어트와 섹스-정희진

DidISay 2012. 4. 11. 02:10

 

 

다이어트와 섹스

                                       

   미국의 여배우 기네스 팰트로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라는 영화 촬영을 위해 뚱뚱하게 분장하고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사회가 뚱뚱한 여성을 얼마나 적대시하고 함부로 대하는지 느꼈다며 놀라워했다. 체중이 늘어난 성 판매 여성에게 벌금을 물리는 성매매 업주가 뉴스에 보도된 적도 있다. 갓 결혼한 남성들은 종종 연애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아내의 식사량에 ‘충격’을 받는다. 여자가 그렇게 밥을 많이 먹는 줄 몰/랐다고 말하는 남편들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무게는 절제와 인내력 등 자기관리의 지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인격과 정체성의 기준이 된 지 오래다. 물론 뚱뚱한 남성도 환영받지는 못하지만, 몸무게가 일상적으로 남성의 삶을 통제하거나 규율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체중은 곧바로 취업·결혼·대인 관계·자존감으로 연결되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다. 여성의 거식증(拒食症: 먹는 것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병적 증상)은 연속체로 존재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먹는 양을 조절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다. 다이어트는 여성 문제 중에서도 여성의 ‘주체적 종속’이 가장 심각한 영역이다. 다이어트 성공은 여성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의 하나로 간주된다. 왜 여성의 굶주림은 사회적 보상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어째서 여성의 몸은 음식과 몸무게의 전투가 벌어지는 격전지가 된 것일까? 왜 여성은 마치 성욕을 느낄 때처럼, 초콜릿 케이크를 보고 식욕을 느낄 때 죄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남성 문화는 여성과의 섹스(혹은 강간)를 ‘따 먹는다’, ‘맛있겠다’ 등 먹는 행위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표현들은 여성의 몸을 남성의 행위 대상으로 삼는 가부장제 사회의 관점을 드러낸다. 어느 인류학자에 의하면, 서양 문화에서 남성이 섹스할 수 있는 여성은 먹을 수 있는 고기의 순서로 비유된다고 한다. 동물은 집에서 기르는 순서대로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는데, 개-고양이-돼지-호랑이는 각각 누이-사촌-친족 제도 밖의 여성-이민족 여성을 상징한다. 너무 가까워도(누이), 너무 멀어도(이민족 여성) ‘못 먹는’ 섹스 금지 대상인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이 ‘먹는 것’이다.
1995년에 제작, 발표된 박철수 감독의 영화 「301·302」에서 주인공(황신혜 扮)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성폭력으로 거식증에 걸리고, 또 다른 주인공(방은진 扮)은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며 강박적으로 음식 만들기에 열중한다.

    이 영화는 여성의 성적 고통이 식욕 문제로 드러나는 현실을 빼어나게 재현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식욕은 통제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들은 폭식을 하더라도 집단적으로 여럿이 모여 먹고 마신다. 하지만 여성에게 폭식은 수치로 여겨지기 때문에, 먹더라도 밤에 혼자 먹는다. 또한 남성의 식욕과 성욕은 무관하지만, 여성의 식욕은 곧 성욕으로 유추된다.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어머니나 친구 등 주변 여성들이 나서서 협박에 가까운 걱정과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식욕과 성욕은 모두, 혐오스런, 최소한 바람직하지 않은 여성성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섹스와 음식 만들기는 가부장제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노동이다. 즉, 음식과 성을 노동으로 강요받는 사람은 여성이지만, 여성은 음식과 성을 즐길 수도 없고 욕망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남성은 수 천년 전부터 생식이나 쾌락, 자기실현 등 다양한 차원에서 성을 즐겨왔지만, 여성의 성은 지금까지도 출산의 영역에 한정될 것을 강요받는다. 여성의 성욕이 부계 가족 유지-아들 낳기만을 위해 허용되듯, 여성의 식욕이 찬양되는 시기는 임신했을 때뿐이다.

   남성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동시에 달성하기 힘든 이중 메시지인 경우가 많다. 음식을 만들되 먹지 말라, 말라깽이가 되되 가슴과 엉덩이는 풍만하라, 정숙하면서도 섹시하라…. 식욕, 성욕, 수면욕은 인간의 3대 욕구가 아니라 남성의 3대 욕구인 셈이다.

   흔히, 여성은 ‘보는 주체’가 아니라 ‘보여지는 대상’으로 간주된다. 사회는 여성의 몸이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에만 몰두할 뿐, 여성의 몸이 어떻게 ‘느껴져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여성은 남성의 눈으로 자신의 몸을 만든다. 물론, 요즘 세상에 다이어트나 화장 등 외모 관리를,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촌스럽게 말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 대개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그 ‘바람직한 자기 이미지’는 미디어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남성은 여성만큼 ‘자기 만족을 위해’ 다이어트와 외모 관리에 몰두하지 않는다.

   왜 거식과 폭식 등 섭식 장애로 고통받는 사람의 95%가 여성일까? 남성 중심적인 사회는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폭식으로 해결하려는 여성들의 상황을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덜 된 신호를 파악하고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으로 본다. 여성의 섭식 장애는 지극히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다.

   여성과 여성성을 비하하고, 여성에게 이중노동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감정의 허기, 남성의 이중 메시지로 인한 무기력 같은 정치적 허기를 신체적 허기라고 착각하기 쉽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좌절이나 분노, 우울증 같은 학대당한 경험의 표현을 억압하는데, 여성이 자기 고통에 직면하지 못할 때 섭식 장애가 나타난다. 폭식이나 거식은 언어화되지 못한 여성 문제가 머무는 도피처, 연막인 것이다. 다이어트는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자아 존중감과 관련된 문제이다. 거식은 여성의 자기혐오로 인한 몸의 ‘축소 열망’(소멸은 죽음)이며, 폭식은 남성의 투사(投射, 남 탓으로 돌리는)와 대비되는 여성의 내사(內射, 자기 탓으로 돌리는)의 일종인 우울증으로서, 사회가 싫어하는 여성이 되겠다는 자기 처벌이다.

   하지만 영혼의 배고픔이나 심리적 좌절은 음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달리, 이상 식욕이 ‘과정 중독’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알콜 중독은 알콜 자체에 중독되는 것이지만, 폭식증은 음식이 아니라 ‘먹는 행위’에 대한 집착이다. 그래서 감정과 정치적 영역에서의 나의 심리 행동을 외면한 상태에서, 음식 자체에 집중하는 살빼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음식이 적이요, 자신의 몸은 늘 배신자가 되는 상황에서 다이어트는 자기혐오를 내면화하는 과정이 된다. 나의 타자가 내가 되어서는 해결이 어렵다. 타인의 내 몸에 대한 판단은, 내 몸에 대한 나의 생각을 경유한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이 먼저다. ‘아름다운’ 몸은 자기 사랑의 수많은 열매 중 하나일 뿐이다.

 

 

                                                           -  정희진/여성학자.서강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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