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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만나는 시간

누가 이들의 결혼을 비극으로 만드는가

DidISay 2012. 6. 27. 14:35

 

앤드루 와이어스, 결혼, 패널에 탬페라, 1953년, 61X61

 

오늘 본 가장 슬픈 기사는, 60대 노부부의 동반자살 소식이었다.
이 부부의 죽음 뒤에 남은, 통장잔고는 3천원.

자식의 도움이나 주변과의 교류가 전혀 없는 상태로 계속 생을 이어가던 부부에게,
수입은 월 15만원의 노령연금이 전부였단다.

1인당 월 7만5천원으로 몇년간 삶을 이어간 셈인데,
장례비로 사용하라고 신권5만원으로 50만원을 남겼다는 기사의 말미를 보고는 참 마음이 아득해졌다.



자살은 자존감이 낮은 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초라함을 자신의 내적 모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꼿꼿한 마음의 대를 가진 사람의 것이다. 
열망, 증오,권태의 감정을 알지 못하고, 감수성을 철저하게 죽인 자는 절망과 좌절의 감정을 알지 못한다.


생을 마감하는 그 끝자락에서 꺠끗한 신권으로 10장의 지폐를 남겼을 그 심정을 생각하니
참 끝까지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단정하기까지한 노인네의 마음이 떠올라서, 기사를 보고 나서도 한참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이 기사가 무서운 것은, 이런 일이 단순히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태연하게 넘길 수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배운 것이 많고 돈이 많더라도, 한순간 잘못 선 보증 혹은 사업의 실패..등등으로 나락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 뒤로는 떨어지는 개인을 잡아줄 사회적 안전망이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 주머니에서 돈이 없어지는 순간 인간의 존엄성이나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여력 역시 허공으로 사라지고 만다. 
홍길동이 그토록 간절히 외쳤던, 천부인권이 21세기 한국에서도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오늘 기사를 보고 떠오른 것은  '결혼'이라는 작품.
어느날 이웃집에 들렀던 화가가, 그 집 노부부가 창백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와 그렸다고 한다. 

앤드루 와이어스(Andrew Wyeth)는 미국을 대표하는 극사실주의 화가로,
한국에는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고등학교 개정교과서에 실리는 등 최근 알려지기 시작하는 추세인 것 같다.
3대를 이어가는 화가 집안인데 세대를 거쳐 변하는 이 집안의 그림을 비교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이 작품은 '결혼'이라는 축복과 행복과 함께 짝을 지어야하는 단어에는 맞지 않게
칙칙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그림이 인상적이다.

톤다운된 붉은 색과 갈색 침대헤드는 녹색빛이 도는 창백한 얼굴빛을 강조하고 있고,
앙상한 가지로 봐서 가을임이 분명한 서늘한 날씨임에도 창문을 열어놔 차가운 바람이 느껴진다.

이 부부도 날이 추웠는지 이불을 목 바로 아래까지 끌어올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온기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마치 타인인양 일정한 공간을 유지하고 있다.
고개의 방향조차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서, 따로따로 떼어봐도 자연스러울지경이다.

이들이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노부부인지, 동반자살을 한 부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에게 남은 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삶의 조각조각들 뿐인 것 같다.

최소한 동반자살을 하겠다면 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그런 애절한 사랑의 감정이어야할텐데
이들 부부에게는 그런 열정이나 처절함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도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는 누구보다도 사랑하겠다고, 행복하게 살겠다고 마음 먹은 연인이었을텐데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한 가닥 즐거움도 남지 않은 삶..

 

 

 


소득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 양극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세계화가 진행되는 나라의 공통적인 특징이지만,
한국은 그 격차나 정도가 더 심각하다.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복지체제를 대표하는 문구는 '낙후된 국가, 성장한 시장, 선택된 공동체'였다.
시장은 발전해 기업에 의한 기업복지는 빠르게 확대되었지만,
가족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혈연,지연의 연(緣)복지는 선택되어 존속해왔다.

혈연이나 지연에 기초한 공동체는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사회복지의 핵심적 제공 주체였다.
부모의 복지를 제공하는 주체는 국가 이전에 그들의 자녀라는데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어떤 노인이 돈이 없어 자살했다면, 비난 받는 것은 복지제도를 마련하지 않은 국가가 아니라 그들의 자식이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가족과 촌락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중앙집권적 권력과 대립하지 않아
서구와 같이 해체되지 않고 효율성과 유용성 때문에 연줄망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지속될 수 있었다.

연복지는 복지와 관련된 행위자들의 선택을 제약한다.
첫번째로는 연복지가 더 익숙한 시민들이 국가에게 복지요구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 복지정치의 작동을 막는다.
또한 정책결정에 있는 관료들의 행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관료들이 지속적인 정치적 학습과정을 통해
가족을 비롯한 공동체에 복지의 책임을 전가해 연복지를 의문화하고 있다.


이로 인해 비단 노인층 뿐만이 아니라, 다문화가정, 빈민층 가정과 같은 소외계층들과 주류 계층의 교류가 단절되고 
가난과 절망이 대를 이어 반복되는 현상은 이제 낯설지 않고 당연하게까지 느껴진다. 
조세희는 '난쏘공'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이 비극들은 누구의 잘못일까?

불교 화엄경에는 제석천의 궁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드라의 궁전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고.

한 사람의 불행과 기쁨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조금씩 영향을 준다는 것..

 


모든 것에는 흥망성쇠가 있고, 삶에 가장 맞닿은 것이 죽음이라고 하지만
그저 황량한 한순간의 감정으로 넘기고 지나가기엔 오늘은 이 그림에 참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