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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외로움이 이제사 내게로 전해져 왔다. 본문

그림과 만나는 시간

한 사람의 외로움이 이제사 내게로 전해져 왔다.

DidISay 2012. 7. 2. 03:08

나는 한국이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변하게 된 가족관계를 다룬 소설들을 참 좋아한다.

어머니에게 아무 물질적 도움을 받은 것이 없다는 이유로
아주 작은 짐조차 지고 싶어하지 않은 아들이 등장하는 이청준의 '눈길'이나,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당숙 아저씨와의 동거로 인해

첨예한 갈등을 겪게 되는 가족을 그린 공선옥의 '일가'는

핵가족화가 되면서 말로만 가족이며 일가(一家)이지

실제로는 타인보다 불편해진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육친들과 살을 맞대고 사는 느낌을 느껴본적이 없어서인지,
이 작품들을 배울 때면 저 소설들의 미묘한 느낌을 잘 포착하지 못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사실 핵가족에 익숙하고, 대가족의 끈끈함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건 나도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왜 이리 이 작품들이 애잔한 슬픔을 주었는지.

 

처음에는 그저 직업이나 전공적인 필요에 의해 찾았던 작품들이 남긴,
마음의 진한 흔적을 알아차리게 된 것은 언제였을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어쩐지 어렴풋한 슬픔을 느낄 수 있어서 그 애상적인 느낌에 끌리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집이 친척간의 분쟁이나 부모님의 싸움 한번 보지 못한, 사이가 꽤 돈독한 가족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친지나 가족들에게 피붙이의 끈끈함을 항상 느끼진 못하기 때문에
그 근원에 대한 의구심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다루게 될 그림은, 이 소설들의 황량한 느낌과는 아주 대조적인
행복하고 따뜻한 기운이 폴폴 풍기는 그림이다.


Many Happy Returns of the Day (1856) William Powell Frith

 

윌리엄 파웰 프리스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잘 포착한 화가인데,
이 그림 역시 19세기 영국 중산층 가족의 어느 식탁을 보여주고 있다.


'행복한 화담이 많이 오가는 날'이라는 제목처럼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차려진 풍성한 식탁엔 가족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식탁 중앙엔 오늘 생일상의 주인공 여자아이가 보이고,

예쁜 화관도 걸려있어 축복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또한 화면 가장 왼쪽의 하녀는 생일 선물처럼 보이는 인형을 들고 있어서,
저 인형을 가지고 놀 여자아이의 모습이 상상되어 웃음을 짓게 한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이나 식탁의 음식들 역시 풍요로워보이는 이 가족의 삶을 잘 보여준다.
할아버지가 목마를까봐 잔을 들고 다가가고 있는, 붉은 장미가 수놓인 우측 소녀의 드레스나
촤르륵 흘러내리는 여인들의 치맛단과 식탁보의 접힌 주름단의 세세함이 사랑스럽다.
행복하고 다사로워 보이는 가족이다.  

식탁 왼쪽에 앉아 있는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어머니는

아이들이 음식을 먹는 것을 지켜보느라 바쁘고
할머니를 비롯한 친척아주머니들도 아이들을 관찰하며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새침떼기처럼 보이는 얌전한 소녀들과는 달리,

남자아이들이 손으로 음식을 집어 개구지게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화가는 빅토리아 시대 남자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남자와 여자의 자리를 구분했는데,
아들에게 둘러싸인 아버지는 멀찍이 떨어져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환담을 나누고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신문을 읽는 것을 멈추고 소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사회적인 일 보다는 가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행복이 유지되려면 서로의 노력과 불편함을 감내하는 희생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늘, 가족과 함께 있어도 항상 신문을 바라보는 사람일까?
아니면 잠시 고개를 들어 소녀를 사랑스럽게 응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가족의 일원일까?
이 가족의 식탁 풍경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실질적으로 핵가족 범위를 넘어서는 이런 화목함은,

몇몇 명절 기간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우리는 그 며칠 안되는 명절 마저도 불편해서 견딜 수 없어할 때가 많다.
도대체 언제부터 명절은. 우리의 일가는 우리에게 타인보다 더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앞서 언급했던 이청준의 눈길에서 30대의 '나'는 70년대의 급격한 사회변동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이 세대는 어린시절 농촌에서 자라 도시에 나가 근대사회체제,

즉 자본주의에 자리잡기 위해 치열하게 일했던 세대다.
이들이 성인이 되어 맞이한 세계는 박정희가 내건 조국근대화의 시대였다.

경제개발계획에 맞춰 국가 주도의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졌던 시기.

모든 사회시스템에서 열심히 봉건적인 것들을 갈아엎던 시대.
그리고 그 역군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봉건적 공간(농촌)에서

유년의 달콤함과 쓰라림을 겪어온 '나'와 같은 세대들이었다.

이 세대는 뒤쳐지지 않기 위해 앞만 보며 달렸고 과감히 자신들의 고향과 유년을 파괴했다. 
박정희는 발전 이데올로기를 '잘 살아보세!'로 표현함으로

가난한 민중들에게 천년왕국의 환상을 보여줬다.
사실 그 발전의 끝은 결코 대부분의 민중들의 잘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잘 살게 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렇게 발전이데올로기와 자본은 한국사회에서 종교가 되었고 영생불사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경제의 양극화나 천박한 자본주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

나'로 대표되는 아들세대의 정신적 장애다. 
그들은 도시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계산적 합리성을 몸에 익히고
유년시절 기성세대에 의해 가르침 받았던 정신적 가치를 철저히 탈색했다.

'나'가 자신의 어머니를 감히 '노인'이라 부르며 거리를 두는 것은,
기존세대에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전통적인 봉건적 가치 '효'를

'빚'으로 탈색했을 때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는 노인에게 물질적으로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빚문서 역시 있을 수 없으며 난데없는 부채감은 불편할 뿐이다.
단지 인간은 컴퓨터처럼 쉽게 파일을 삭제하고 휴지통에 넣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워할 뿐.

이청준은 말간햇살과 눈길의 이미지를 통해 스러져가는 자신의 부모세대를 표현했다.
말간 햇살의 이미지는 이청준이 표현하고자 했던

노인의 행동과 마음씀씀이의 고운 결이 자아내는 빛깔일게다.



노인은 집안의 몰락으로 끝까지 아들을 건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뒷산 잿등에서 차마 마을로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리고 그 아들이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을때 까지도, 그 미안함을 간직하며 가슴아파 한다.
이청준은 차마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마음과 행동,

아들에 대한 몹쓸 늙은 것의 죄책감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것이 전통세대가 지녔던 노인의 윤리이고 품격이다. 
그것의 정치적 옳고 그름과는 무관하게, 그 세대가 추구하던 품위는 그런 것이었다. 

이청준은 우리를 눈길에 끌어들여 그 아름답고 깨끗한 이미지를 가르쳐준다.
그 부모세대들은 모두 죽어 사라졌다.
이청준은 이제 찾아뵐 수 없는 어머니를 말간햇살속에 빛나는 새하얀 눈이란 이미지로 새겨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더이상 부모세대들의 품격을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더 넓은 의미의 가족들.. 사촌이나 오촌의 괴로움이나 삶의 고단함은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직 나의 가족. 나의 외로움과 괴로움만이 더 중요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 집에 체온을 부대끼며 산다는 의미의 일가(一家)란 말도 안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공선옥의 소설에서 소년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당숙이 우리집에서 쫓겨나듯 떠난 후 홀가분함을 느낀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날 그 아저씨를 떠올릴 때면,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갖게 된다.
어느덧 아이가 아닌 소년이 되어, 그는 이렇게 되뇌인다.



....내가 내 외로움 때문에 울 때는
아직 그가 덜 컸다는 증거고,
나와 상관없는 남의 외로움 때문에 울 수 있다면
이미 그가 다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 눈물은 왜 나오는 것일까.
이것도 나중에 저절로 알아지는 눈물일까.
그것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의 외로움이 이제사 내게로 전해져 왔다는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