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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이 추해질 때. 본문

그림과 만나는 시간

늙음이 추해질 때.

DidISay 2012. 7. 1. 05:38

우리가 나이듦에 따라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는 아마 '추하다'는 단어일 것이다.
젊은이들이 밉살맞은 짓을 하거나, 어린 아이들이 악동짓을 할 때는 좀처럼 붙지않는 이 단어는,
유독 나이든 누군가가 방정맞은 짓을 할 때 어김없이 등장한다.
아마 세상 사람들은 늙음은 추함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혹자는 늙음은 낡음이 아니지만, 낡는 순간 그 사람은 늙은 것이라 표현하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설렘이 없어졌을 때 그 사람은 늙은이가 되어가는 것이라 말한다.

사실 '황혼'이라는 고운 이름으로 노년기를 바라본다면, 늙음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제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격동의 세기를 모두 보내고, 느긋하게 뒤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노을짐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지혜로운 자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에게 익숙한 노익장은 대부분 부정적인 모습으로, 언제나 대단치도 않은 추억을 레코드판처럼 읊어대며
외형이 추하고 냄새가 나며, 나잇살 좀 먹었다고 아랫사람을 을러대는 한심한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반영하듯 대중매체에서는 노인들의 다양한 면모를 긍정적으로 다루지 않으며,
주류 프로그램에서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노인들의 모습은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늙음은 곧 병듦과 연결되고, 이는 죽음의 이미지를 가지며
결과적으로 이는 쿨하거나 아름답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세월의 흐름을 감추기위해 보톡스를 맞아대며, 늘어지는 주름을 막아보려 애초로운 시술을 시도하고
조금이라도 동안으로 보이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려보이게 해준다는 화장법을 연구한다.

라오콘, 바티칸 미술관


라오콘상은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이 동료들에게 목마 안에 감춰진 위험을 경고했다가
포세이돈이 보낸 두마리의 끔찍한 뱀들에게 두 아들과 함께 잡아먹히는 순간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는 결코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장면이지만, '억제되고 고뇌에 찬 중얼거림'이 생생하게 다가와
묘하게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데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을 바로 '숭고미'라고 한다.

숭고를 다룬 초기작품들은 예술적 효과보다는 무형의 것, 고통스러운 것, 무시무시한 것이 지배하는
자연 현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우리의 고전시가에도 숭고미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주로 거대한 폭포나 장엄한 암벽들, 폭풍이나 거친 바다를 보면서
공허함, 어둠, 고요, 격발 등의 감정을 음미하는 형태로 묘사된다. 

이런 감정들이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우리를 소유하거나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같은 불쾌하고 무서운 것이라도 늙음이나 병듦과 관련된 작품은 숭고미 보다는 추함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이유는 아마, 우리에게 나이듦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반 올브라이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늘날 우리는 노화를 막고 잘생긴 모습을 유지하며, 동시에는 창조까지 하면서! 방종하게 살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처럼 우리의 실질적인 쇠락과 내면의 추함이
우리 대신 타락한 초상화에 의해 가차없이 드러난다면 매우 불행해 질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죽음을 잊으려 애쓰고, 죽음을 감추면서 묘지로 돌려보내려 힘쓴다.
에둘러 '돌아가셨다'라는 말로 죽음을 말할 뿐, 누군가가 '죽었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꺼리며
자신의 죽음을 잊으려 애쓴다. 특히 중세 시대의 죽음은 생생한 현실이었다.

때문에 예로부터 인간의 노화에 대한 멜랑콜리한 사유들은 꾸준히 증가했고
고통과 사악함과 늙음은 마치 삼위일체처럼 짝을 이뤄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셰익스피어 역시 캘리번이나 리처드 3세의 고통을 나타내면서 씁쓸한 연민을 함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늙은 여성은 미와 순결의 상징인 젊은 여성과는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억지로 치장하려고 하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고 초라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몇몇 그림들을 보면 악의적으로 느낄만큼, 노인들을 매우 추하게 묘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르톨로메오 파세로티, 캐리커처                                                  프란체스코 하이예즈, 키스

 

 

위의 이미지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같은 행동인데도,
노인들의 행동은 외설적이고 불쾌하게 다가온다.


체코 안졸리에리의 '반 베아트리체'라는 시집에서는 나이듦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봐, 참폴, 보게나! 저 노파가 얼마나 주글주글한지.
그리고 똑바로 몸을 펴면 어떤 모습인지, 사방에 퍼지는 체취는 얼마나 코를 찌르는지,
얼굴과 어깨, 자세는 바르바리 유인원과 얼마나 닮았는지,
게다가 우리가 쳐다보면, 그녀는 화를 내며, 뿌득뿌득 이를 간다네.
그녀를 보면서 분노나 고뇌, 숨죽임, 사랑은 별로 느끼지 못할 터, 커다란 행복감마저 느껴지지 않겠지.
오히려 그녀를 보고도 마음의 욕정이 모두 사라지지 않는 게 놀라울 뿐이지."

중세인들에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인간의 사랑이나 감정마저 사라져버린다는 것.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 그대로 무성의 인간이랄까.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바니타스

 

위의 여인을 보면 분명 젊었을 적엔 우아하고 고왔을 얼굴인데, 이제 젖가슴은 축 늘어져 탄력이 사라져 민망하기만 하다.
다른이의 도움을 받아 치장을 해보려한들, 은발의 머리결은 화려한 머리장식에 대조되어 초라하기만 하며
늘어지기 시작한 주름살은 서럽게만 느껴진다. 꽃을 쥐고 있는 저 모습이 어찌나 슬픈지..
헛되다는 의미의 바니타스. 제목 그대로 젊음이 모두 사라진 후의 인생무상을 보여준다.

남성을 묘사할 경우에도 상황은 그리 부드럽지 못해서,
여성의 젊음에 대한 열망이 희극적으로 묘사되었다면, 나이든 남성은 악마나 괴물로 주로 표현되었다.

 

페테르 루벤스, 수산나와 장로들


이 그림 역시 토실토실하고 뽀얀 피부임이 분명한 여인의 몸이 나이든 두 장로와 대비되고 있다.
수산나를 갖기 위해 희롱하고 협박하는 구부정한 모습이, 보는 이에게 불쾌감을 주는데
이렇게 여성의 젊음을 탐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일종의 전형적인 모습일 정도로 꽤 흔하게 묘사되고 있다.

동양의 소녀경에서도 회춘하는 방법 중 하나로 노인에게 소녀의 기운을 흡수할 것을 권장하고 있고,
중세 유럽에는 꾸미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소녀의 피를 마신 악녀가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건강하다기 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자신의 나이듦을 인정하지 못하고, 젊은이가 가진 것을 빼앗고 욕망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추하게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질병이나 세월의 흔적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인데,
과연 이들을 사악하게 만든 것은 시간의 흐름일까 아니면 그들을 악의적으로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일까.

 20세기 미국 문학 시간에 단골로 읽히는 소설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는 '위대한 개츠비'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위대하다라고 말할까. 과연 작가 피츠제럴드가 생각한 개츠비의 '위대함'은 무엇일까?

소설에 등장하는 개츠비의 삶은 전혀 위대하지 않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속물적인 여성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사랑을 돈으로 찾기 위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며 일생을 보냈으며
단순하고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자였을 뿐이다. 게다가 결말 역시 매우 우울했다.

하지만 작가는 개츠비가 암담한 현실 속에서 "아무리 미미해도 삶 속의 희망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사랑에 실패해도 다시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

즉 언제라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낭만적 준비성',
그리고 "삶의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무언가 기대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써버리고 내어줘버리고 만다.
남겨둘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모두 소진해버린다는 점에서, 그 노인은 어떤 젊음보다 더 순수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노년의 모습도, 이제는 사라져버린 퇴색해진 '과거'를 붙잡으려 애쓰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니라
이제는 관록의 자리에서 사사로운 권력이나 돈,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미래'를 꿈꾸는 모습일 것이다.



조선의 송익필은 망월(望月)이라는 7언율시의 시를 지었다.

보름달 되기 전엔 더디게도 차오더니
보름달 되고 나더니 쉬이도 이지러져
서른 밤 밤중에 둘글기는 단 하루 밤
백년 사는 우리 인생 이와 꼭 같다네


오늘의 하늘이 푸르르고 꽃이 피었어도 봄날은 가기 마련이고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단다.
때문에 나이가 들고 늙어감은 돌연사事가 아닌 자연사이다.
이뤄질 일이 마침내 이뤄졌을 뿐, 슬프거나 서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4계절이 있는 이유는 설렘을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게 작은 일상에서도 두근거림을 발견할 수 있는 노인이라면 그 마음이 얼마나 젋게 느껴질까.

앞으로 단 몇 년을 내다볼 수 없을지라도, 설렘이 있는 노인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사회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다사로운 노인의 모습을 결함이 있거나 주책맞는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우리라면 좋겠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손자와 함께 있는 노인의 초상

 

이제는 자신에게 없는 젊음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자애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진.
그런 황혼을 소망한다.

 




 

(늙음에 대한 생각은 예전부터 쓰려고 했던 것이라 글을 풀어나가다 보니, 그림이 너무 많아졌다 =ㅁ=
다음엔 그림 하나만 잡고 쭉 이야기를 풀어나가야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