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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만나는 시간

하늘에서 시냇물이 거꾸로 흐르는 날

DidISay 2012. 7. 3. 22:21

오늘은 하루종일 강의실에 갇혀서
꽤 많이 쌓인 모의고사 기출 문제집과 씨름했다.

 

아주 가끔 네모반듯한 커다란 교실에서
역시 각이 진 거대한 유리칠판 앞에 서 있자면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곤 한다.


특히 햇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봄이나, 쨍한 하늘빛이 눈부신 가을날이면
괜시리 이런저런 감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섣불리 일탈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른이 된 후 너무 많이 우리를 얽매고 있는 수많은 족쇄들 때문이다.
그 족쇄는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
우리를 불안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어쩐지 구름 낀 날씨에 기운마저 없어서
따끈한 음식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물줄기.
마치 시냇물이 하늘에서 거꾸로 흐르는 듯한 강렬한 폭우였다.

 

 

 

 

진 호슬리, 봄비,1976, 오클랜드 미술관


 

화가가 수채화로 화사하게 그려낸 이 그림은
봄비라는 제목에 걸맞게 화사한 꽃을 연상시키는
노랑, 빨강, 파랑의 고운 색 한뭉치로 꽉 차 있다.

 

하지만 색이나 형태가 또렷하지 못하고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차창 너머처럼 흐려지고 번져
어딘지 아련한 느낌을 준다.

 

저 빗줄기 건너편에 있는 형체의 주인공은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화려한 원피스일까,
가게에서 쏟아지는 색색의 조명들일까.
아니면 그저 횡단보도를 건너는 군상들일까.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중학교 때 다녔던 피아노 레슨실의 어느날이다.

 

 

피아노 콩쿨이 있는 날이면 꼼짝없이 앉아서 피아노를 끝없이 쳐야했는데,
어느날은 나와 친구 단 둘만 나와 레슨을 받게 되었다.

연휴기간이라 온가족은 여행을 가고, 나는 홀로 연습을 하려니
서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오직 나와 친구의 피아노 선율만로 위로 받을 수 밖에.

 

 

이 친구도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쉬는 시간 중간중간에 나와 눈짓을 주고 받으면서
불쌍한 표정을 서로에게 지어보였는데, 선생님이 워낙 무서워서 반항할 생각도 못하고
그냥 그저 그렇게 계속 건반을 두드릴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이 일이 있으시다면서
얌전하게 연습을 하고 있으라고 하신 뒤 나가시는게 아닌가!

 

우리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랐는데
사실 무언가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어딘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마침 실비가 내리기 시작한, 유리창 너머는 참 매력적이었는데,
정원 너머로 보이는 진한 초록빛. 온갖 조명이 반사되서 영롱하게 비치는 정경은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잠깐 밖에 나가볼까 하고 나왔는데
재잘재잘 꺄르륵 거리면서 수다를 떨다보니
꽤 먼거리를 걸어와버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쏟아지던 소나기.


지금이라면 옷이나 머리카락이 젖을까봐.
가방을 안고 뛰거나 어느 건물 안으로 도피했겠지만
이날 우리는 질풍노도의 청소년이 아닌 질풍노도를 즐기는 청소년이 되어버렸다.

 

둘다 짜기라도 한 듯이, 환하게 웃으면서
우산도 없이 골목길을 한참이나 걸어다녔는데
흰 셔츠에 와닿는 차갑고도 따가운 빗줄기가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그렇게 30여분을 맞고 비가 어느정도 잦아들자 우린 겨우 레슨실로 돌아왔다.

 

선생님도 이미 도착하셔서 기다리고 계셨는데 비에 홀딱 맞은 우리를 보시더니 한숨을 쉬시며
머리며 옷을 말리도록 해주셨다.

 

낡은 선생님의 옷가지를 입고 마시는 핫초코는 꿀맛이었고,
답답해하는 우리가 불쌍했는지 틀어주신 '타이타닉'은 너무나 재밌었다.

 

작은 티비 속에서 침몰해 가던 배들과 길고 길었던 폭풍우.
그리고 다시 시작된 창 밖의 거센 비바람
따뜻한 실내와 그 때 그 친구의 꺄르륵 하는 웃음소리들

 

그 뒤로 다시는 비를 맞으며 일부러 돌아다니는 일이 없었지만,
이 기억은 내가 중고등학교 때 해봤던 소심한 일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다.

 

 

그 때 내 몸에 기억된 그 해방감은 참 강렬했나보다.
어른이 된 후에도 답답한 일이 생기거나
거친 비가 쏟아질 때면 항상 이 날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이러면 어쩌지 하고 멈칫하는 마음의 소리를 확 무릎 끓리는 통쾌한 느낌.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일에 내 마음을 던져버리는 일.

어떻게 추스를지 대책이 없을 때는 염려를 떨쳐버리고
자유를 시원함을 만끽하는 것이 어쩌면 마음을 후련하게 하는 것 같다.


소설가 김훈은 사랑은 물가에 주저않은 속수무책이라고 했다.
속옷까지 모두 젖어오고 지난 뒤엔 후회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엔 너무나 달콤하고 즐거운 것.

 

흐려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갑갑한 창문처럼
우리의 인생도 한치 앞이 안보이는 함정투성이의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창문을 색색의 아름다운 형체들이 수놓을 수 있게,
어차피 속수무책이라면 적어도 지금 이순간은 최선을 다해 행복을 누려보리라 마음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