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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움베르트 에코

DidISay 2012. 10. 20. 11:29

 

 

 

갑자기 다시 읽고 싶어져서, 엄마에게 보내달라고 한 책 중 하나.

움베르트의 에코 책 중 가장 가볍고 재밌게 읽을만한 작품이다.

 

책이 오래 되어서 상태가 안좋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본가에서 곱게 보관해서 세월에 살짝 바랜 것 외엔 괜찮았다.

 

 

 

움베르트 에코가 문학 잡지 '일 베리'에 정규 칼럼으로 기고 했던 글을 모아서 두 권의 책이 출판되었는데,

'작은 일기(Diario Minimo)'와 '작은일기 2(IL Secondo Diario Minimo)'가 그것이다.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은 그 중 '작은 일기2'에 해당하는 것으로

'작은일기'는 원제 그대로 한국에서 출판되었는데

아마 2권은 한국어판으로 나올 때 제목을 바꾼 것으로 예상된다.

 

 

 

 

이 책을 언제 읽었었나 내용도 가물가물하고 잘 떠오르질 않았는데,

책에 메모된 것을 보니 초등학교 때 읽었었다. 이러니 기억이 안날 수 밖에;;

 

움베르트 에코의 책 중  '미의 역사' '추의 역사' '장미의 이름' 같은 작품들은, 

주석도 길고, 내용 자체도 배경지식이 없다면 책장 넘기는 것이 힘들정도로 꽤 어렵지만

이 책만큼은 청소년들이 읽어도 무난할만큼 쉽고 위트가 넘친다.

('장미의 이름'은 고등학교 때 선생님 추천으로 읽었다가,

내용보다 주석 이해하는 시간이 더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막상 작가는 왜 이 작품을 썼냐는 질문에,  그저 '수도사를 죽여보고 싶었다' 라고 대답-ㅁ-)

 

 

게다가 내용도 어찌나 재밌는지, 다시 읽는데도 계속 큭큭 웃으면서 읽었다. 

작가가 얼마나 유머감각이 넘치는 사람인지 재발견할 수 있는 책.

 

 

 

 

 

덧)

 

1. 어른이 된 뒤에 읽으니, 어릴적에는 몰라서 그냥 지나쳤던 상품들(에비앙이나 페리에 같은)이

새삼 눈에 들어와서 아 이런 단어들이 나왔었구나 싶었던.

 

 

2. '작은 일기 1,2권' 모두 이미 두권 다 품절된 책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찾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덧붙이는 말인데

만약 에코의 책 중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법'을 가지고 있다면,

그 책과 겹치는 내용이 꽤 되기 때문에 굳이 중고책방을 뒤지진 않길 권하다.

 

하루키의 수필집들도 그렇고, 자꾸 중복되는 내용에 다른 걸 섞어서 시리즈를 내면

도대체 이미 산 사람들은 어쩌라는 것인지 모르겠 -_-;;;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신문 기사를 빌리자면 현대 세계의 두 가지 주된 문제는 컴퓨터의 침투와 제3세계의 괄목할 만한 팽창이다. 옳은 얘기다.

 

  최근에 짧은 일정으로 외국 여행을 다녀왔다. 하루는 스톡홀름에서 묵었고 나머지 사흘은 런던에서 지냈다. 스톡홀름에 들렀을 때 잠시 틈이 나길래 시장에 들러 훈제 연어를 한 마리 샀다. 덩치가 엄청나게 큰 놈인데 값은 거저나 다름없었다. 연어를 플라스틱으로 잘 포장하면서 상인이 말했다.

 

  "보아하니 여행중인 모양인데 이놈을 늘 냉동 상태로 잘 보관해야 할 거요."

 

  그래? 좋다. 한 번 노력해 보자.

 

  기분좋게도 런던의 출판업자가 예약해 둔 호텔은 별 다섯 개짜리였다. 그 호텔은 객실마다 미니 바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호텔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마치 의화단 사건 당시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베이징에 체류하는 외국인 사절단의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투숙객이 호텔 로비에서 한뎃잠을 자고 있었다. 온통 짐가방을 쌓아 둔 틈바구닝서 담요를 두르고 잠을 청하는 기색이었다.

 

  호텔 직원은 말레이시아 사람 몇 명에다가 나머지는 모두 인디언이었는데,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대답인즉슨, 바로 전날에 이 웅대한 호텔에다가 컴퓨터 시설을 했다는 것이었다. 결함을 모두 체크해서 제거하려면 시간이 더 걸려야 하는데 그만 두 시간 전에 컴퓨터 시설이 완전히 고장나고 말았단다. 사정이 이러니 어떤 방이 비었고 어떤 방이 찼는지 알아낼 길이 없다는 얘기였다. 묵묵히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 무렵에 컴퓨터 시설이 원상으로 복구되었고, 가까스로 내 방을 찾아 기어들어가게 되었다. 행여 연어가 상할까 봐 걱정되어서 일단 가방을 열어 그놈을 꺼내 들고 미니바가 어디 있는지 방안을 휘이 둘러보았다.

 

  대체로 호텔에서는 소형 냉장고가 미니바를 대신한다. 냉장고 속에는 맥주 두 병과 독주가 든 미니어처 술병 몇 개, 과일 주스 캔 서너 개, 땅콩 봉지 두 개가 들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날 내가 들어간 호텔 방의 냉장고는 대형의 가정용이었다.냉장고 문을 열자 위스키와 진, 드람비, 쿠르보아지에 따위가 50병, 페리에가 큰 거로 여덟 병, 비텔로아제 두 병, 에비앙 두 병, 반 병짜리 샴페인 세 개, 기네스 흑맥주, 에일 맥주, 네덜란드 맥주, 독일 맥주, 프랑스 제와 이탈리아 제 백포도주 병이 보였다. 땅콩과 칵테일 크래커, 아몬드, 초콜릿 따위도 들어 있었다.

 

  도저히 연어를 집어 넣을 공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널찍한 조리대 서랍 두 개를 열어 냉장고에 든 물건들을 그리로 옮겼다. 냉장고에는 연어를 집어 넣었다. 손을 탁탁 털고 연어 문제는 그쯤에서 잊어버렸다.

 

  다음날 외출했다가 오후 4시에 호텔 방으로 돌아와 보니 이게 웬 일인가, 연어가 식탁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냉자고는 다시 온갖 고급 술과 과자 따위로 꽉 들어차 있었다. 서랍을 열자 내가 그곳에 넣어 둔 물건들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접수계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냉장고 속이 비었더라도 그건 내가 내용물을 다 먹어서가 아니라 연어를 보관하기 위해서이니 그리 알도록 객실 담당에게 전하라고 당부했다.

 

  접수계원의 답변은 이러했다. 손님에게 받은 주문은 일단 중앙 컴퓨터에 입력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좀더 골치 아픈 문제인데, 직원들은 하나같이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말로는 어떤 지시도 전달 할 수 없다. 전달 사항이 있으면 무조건 회화형 프로그래밍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그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기를 기대하면서 다른 서랍 두 개를 열어 냉장고를 새로 채웠던 물건들을 옮겨 담았다. 그리고 나서 냉장고에 다시 연어를 집어 넣었다.

 

  다음날 오후 4시에 일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연어는 다시 식탁 위에 놓여 있었고 이미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냉장고는 다시 크기가 다른 온갖 병으로 가득 채워졌다. 네 개의 조리대 서랍은 금주법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의 무허가 술집의 밀실을 연상시켰다.

 

  접수계원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자 컴퓨터에 한층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통에 자신도 죽을 맛이라고 대꾸해 왔다. 객실 담당을 호출하자 뒤꼭지에 말총머리를 매단 청년이 나타났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그 청년이 할 줄 아는 말은 나도 모르는 방언이었다. 나중에 가서 인류학을 전공하는 동료한테 물어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건 알렉산더 대왕이 록사나에게 구애하던 시기에 케피리스탄에서 통용되던 사투리였다.  

 

  다음날 아침에 계산성 서명하고자 1층으로 내려갔다.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하고 반나절 사이에 내가 뵈클리오를 수백 리터나 마시고 다양한 위스키를 10리터, 매우 희귀한 맥주 여러 병, 진 8리터, 페리에와 에비앙, 산 펠레그리노 같은 미네랄 워터를 25리터나 마신 걸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유니세프가 보호하는 어린이 전부를 괴혈병으로부터 지켜 주기에 충분한 양의 과일 주스, 아무리 비위가 좋은 사람도 구토를 할 정도로 많은 아몬드와 호두, 땅콩을 먹어 치웠다고 적혀 있었다. 해명하기 위해 애썼지만 직원은 음험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컴퓨터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변호사를 불러 달라고 말하자 아보카도를 한 알 가져다 주었다.

 

  현재 내 출판업자는 몹시 화가 날 대로 난 상태이다. 틀림없이 나를 상습적으로 공짜를 밝히는 인간으로 여길 것이다. 연어는 썩어서 먹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우리집 애들은 내가 주량을 좀 줄여야 한다고 야단법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