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철학 한입-데이비드 에드먼즈, 나이젤 워버턴 본문

소리내어 책 읽기

철학 한입-데이비드 에드먼즈, 나이젤 워버턴

DidISay 2012. 10. 18. 03:53

우연히 서점에서 너무 재밌게 읽고, 선물 받은 책.

 

유명 다큐멘터리제작자와 철학과 교수의 주도로 이루어진

영국의 팟캐스트 오디오 인터뷰를 기초로 구성되어 있다.

(www.philosophybites.com)

 

피터 싱어나 마이클 샌댈처럼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대해

일정 주제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윤리학, 정치학, 형이상학, 미학, 인생으로 테마가 구분되어 있고,

각각 5개의 소주제로 다시 나눠지는데 진지한 것도, 흥미로운 것들도 있다.

 

각 학자들이 나름의 논리를 이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좋다.

다루는 주제가 가볍고 다소 엉뚱한 것일지라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 자체는 논리정연하고 진지하다

 

 

인터뷰어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진행을 하는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나이젤 워버턴 역시 

흐름을 놓치지 않고 시기적절한 질문을 하기 때문에

마치 프랑스의 바깔로레아 모범답안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일반인들을 위한 팟캐스트인 만큼, 용어나 내용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기 때문에

재밌게 읽을 수 있으리라 본다. :)

 

 

 

 

 

덧)

 

1. 똑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더라도

풍부한 배경지식을 끌어와서 설명하는 프랑스식 논술과

이 책에서 나오는 영미식 논리전개 방식은 매우 상이하다.

 

 

 

2. 겉에 포장된 표지도 꽤 예뻤는데,

한꺼풀 벗겨내니 이렇게 비취색이 짜잔하고 나타나서 기분이 좋았다 ^^

눈이 시리도록 푸른 색. 쨍하니 높은 가을하늘을 닮았다.

 

 

 

 

 

 

 

아래는 인터뷰 중 하나의 전문.

논리정연하게 정리가 안되었던 문제인데, 마침 다루고 있어서 반가웠다.

길이가 꽤 길어서 엄두를 못내다가, 키보드가 새로 왔길래 안심하고 타이핑했다.

 

 

 

 


 

1. 사이먼 블랙번에게 상대주의에 관해 듣다.

 

 

 

(E: 데이비드 에드먼즈 /  W: 나이젤 워버턴 / B: 사이먼 블랙번)

 

 

 

 

 

E: 이슬람교도들에게 윤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수용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맨체스터에서는 도덕적으로 수용될 수 있어 보이는 것이 모가디슈에서는 올바르지 않을 수 있고요, 당신은 사형제도나 안락사가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을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다른 영역들에서와는 달리 도덕적인 영역에서는 논쟁들을 해소할 수 없다고 생각하죠. 이를테면, 역사학에서는 헤이스팅스 전투가 정확히 언제 벌어졌는지 논란이 일 수 있고, 수학에서는 어떤 증명이 그 타당성을 의심받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런 불일치에는 확정적인 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겨납니다. 도덕성의 영역은 이러한 영역들과는 다를까요? 그러니까, 도덕은 상대적일까요? 영국의 탁월한 도덕 철학자인 사이먼 블랙번Simon Blackburn 교수가 이러한 질문에 답합니다.


W 이번 주제는 도덕 상대주의입니다. 이 용어에 대해 이해하신 간략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B 도덕 상대주의는 비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해도, 상당히 흥미로운 입장입니다. 상이한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기초적인 관찰에서 출발하는 입장이죠. 사람들은 상이한 사안들에 대해 도덕적으로 서로 다르게 반응합니다. 낙태를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의사의 도움을 받은 안락사가 허용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알라신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상이한 관점과 입장을 갖고 있고, 거기에는 분명 갈등의 소지가 있죠.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이 모든 다양성 앞에서 단일한 도덕적 진리라는 것을 옹호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다양성의 존재 자체가 단일한 도덕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뜻할까요? 맛에 관해서는 단일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W: 맛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죠. <자기 입맛 나름이지.> 지금 설명해 주신 것은 흔히 주관주의의 입장처럼 들립니다. 주관주의가 상대주의의 한 유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주관주의가 상대주의의 골자라고 보십니까?


B: 주관주의는 상대주의의 일종이죠. 따라서 주관주의는 상대주의자입니다. 주관주의자는 상대주의자처럼, 이를테면 나는 낙태가 허용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당신은 당신대로 그렇지 않다고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각자는 스스로의 진리를 갖는 겁니다. 그리고 주관주의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옹호합니다. <나는 나 자신의 반응을 진술하고 있는 중이오. 나는 나 자신에게 낙태를 승인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낙태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오. 이 두 발언은 양립할 수 있고, 각각이 참일 수 있소. 내가 민트 향 치약을 좋아하고 당신은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오>


W: 그렇다면 상대주의란, 도덕성에는 개인적인 차이가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문화적인 설명이 있을 수 있겠죠) 우리의 도덕적인 판단에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는 생각을 담고 있는 이론이 되겠군요. <아기를 고문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진술은 주관적인 것이 되겠네요. 그건 단지 취향의 문제니까요.


B: 그래요. 거의 맞는 말씀입니다. 아주 잘 요약된 정의군요. 주관주의의 사례가 보여 주듯이, 상대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규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정의하든 나는 나의 진리를 갖고, 당신은 당신의 진리를 갖는다는 핵심적인 생각은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우주 안에는 나는 옳고 당신은 그르다거나 혹은 그 반대라고 들들 볶아 대는 형이상학적인(혹은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절대적인) 규범이나 가치 같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W: 그런데 그런 주장은 참인가요? 실질적으로 도덕 상대주의가 도덕의 본성을 제대로 본 걸까요?


B: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참이 아니에요. 참이 아닌 이유는 도덕 상대주의는 불일치와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나는 낙태가 옳거나 허용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당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다면, 우리는 불일치에 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견 충돌은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고, 심한 경우에는 전쟁으로까지 사태가 번질 수 있어요. 각자 취향에 따라 <나는 민트 향 치약을 좋아해> 또는 <나는 싫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과는 다르죠. 치약의 경우라면 그냥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좋아, 그러지 뭐, 난 나대로 살테니까, 넌 너대로 살아, 취향에는 다툼이 없으니까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 하지만 도덕적인 경우에는 단지 그렇게 말하고 끝낼 수 없어요. 나는 사냥개를 이용한 여우 사냥이 절대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그것을 영국 교외 생활의 일부라며 인정한다면, 우리는 정치적인 불일치에 직면하게 되는 겁니다. 상대주의자는 그런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죠. <넌 너의 진리를 가져, 난 내 걸 가질 테니>라고 말하면 얘기가 끝나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상대방에게 어떤 정책을 강요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죠.


W: 의견이 불일치하는 몇몇 경우들에는 문제를 해소해 주는 사실들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그 사실들을 알고 있느냐가 관건일 뿐이죠. 도덕성도 이와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B: 글쎄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에 관한 제 입장은 좀 더 복잡합니다. 예를 들면, <도덕적 실재론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우 사냥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결정해 줄 어떤 사실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밝히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하죠. 그들은 이러한 과제를 일종의 형이상학적 차원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도덕적인 실재가 존재하고, 자신들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다는 겁니다. 저는 좀 더 실용적인 견해를 취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씀은 그런 도덕적 실재가 있건 없건 간에(잠시 동안 이 문제는 한 편으로 치워 둡시다),우리는 의견 충돌을 겪고 갈등을 일으킬 것이고, 그렇다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뭘 해야 할지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마도 세상사 때문에 마음속에서 갈등을 겪겠죠. 내 십대 아들이나 딸이 이러저러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둬도 되는지 하고 말입니다. 도덕적 실재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시도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죠. 그것은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고, 삶을 살기 위해 계획을 세우려는 시도들 모두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좀 더 심각한 도덕적 불일치가 발생하는 경우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다소 신비롭고 존재론적인 우주의 거주자로서의 도덕적 실재를 기술하고자 애쓴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용적인 근거에서 윤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의 실천적인 중요성을 옹호할 겁니다.


W: 도덕적 상대주의자는 여성 할례를 허용하는 특정 문화 집단을 인정할 수도 있다고 말할 가능성이 큽니다. 할례가 우리에겐 그르지만, 그들에게는 옳다는 거죠. 이런 식이라면 이들 두 상이한 집단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전혀 찾을 수 없어요. 이와 같은 문화 상대주의자를 마주쳤을 때 그런 실용적인 생각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말입니다.


B: 글쎄요. 당신이 방금 예로 든 종류의 언급은 흔히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산다는 태도나 묵인의 태도를 옹호하는 구실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에게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즉 우리는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명령을 옹호하는 구실일 수도 있고요.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에는 무언가 잘못이 있다는 거죠.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때때로 맞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들에는 그것이 맞는 말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여성 할례의 경우, 그런 식의 조치가 여러 가지로 너무나 품위가 떨어지고, 또 너무나 여성 혐오적이며, 사람들에게 아주 심한 피해를 끼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위에서 그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 심한 불편을 느끼게 되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W: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종류의 도덕적 상대주의에 결정타가 될 수 있는 유명한 반대 논증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도덕 상대주의자들은 상대주의가 참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거죠.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모든 판단이 상대적이라고 믿지만, 그와 동시에 바로 그 판단, 즉 <모든 판단은 상대적>이라는 판단 자체는 절대적으로 참이며 결코 상대적이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죠.


B: 그렇습니다. 매우 오래된 좋은 논증이죠. 플라톤은 그 논증을 '테아이테투스'편에서 <페리트로페>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논증이 의심스럽다고 봅니다. 그런 식의 결론은 너무 성급합니다. 상대주의자는 분명히 이렇게 반응할 겁니다. <보세요. 예를 들어 나는 불관용이라는 말이나 나 자신의 상대주의조차 절대적인 입장에서 제안한 것이 아니에요. 나는 절대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들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당신에게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말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입장에다 그런 딱지를 붙인다 해도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수용할 겁니다. 그것은 그 입장이 다른 입장에 비해 더 좋을 것도 더 나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그 입장을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제 설득의 목표는 올바른 사유의 방식이란 결국 모든 것을 그렇게 상대적으로 보는 것임으로 당신에게 설득하는 겁니다.


W: 그렇다면 선생님은 본인의 입장을 어떻게 기술하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어떤 명칭이 있나요?


B: 제 스스로 붙였던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명칭이 있습니다. 그런데 좀처럼 그 이름이 떨어져 나가지를 않네요. 저는 준準실재론자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그 입장은 형이상학적인 차원에까지 나아가지 않고도(말했다시피, 저는 도덕적 실재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지 않아요) 불일치라는 측면에서, 즉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라는 측면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려고 애쓰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자기다운 삶인지 고민해 볼필요가 있다는 거죠. 이 모든 것들이 진정한 고민거리이며, 진정한 현실의 모습이죠. 그리고 상대주의자는 실제로 우리의 실제 행동 속에 들어 있는 무언가를 뒤흔들려고 하는데, 저는 우리의 그런 실제 행동을 지키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가 도덕적인 불일치를 인정하고 이를 해소하고자 노력할 때 보이게 되는 진지함을 지키고 싶어요. 그래서 <마치>우리에게 도덕적 실재가 주어져 있으며, 그것을 찾는 것이 우리의 임무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 일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W: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다뤄 보죠. 영국에서 다문화주의는 큰 문제입니다.어떤 사람들은 관용이 너무 지나치다고, 지금 우리는 수많은 불관용적인 사람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풀 고 있다고 우려합니다.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면서 말이죠. 선생님의 접근 방식은 이런 다문화주의에 대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B: 제 입장이 그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무언가 말하게 된다면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하고 있다고 말할 가능성이 아주 크죠. 우리는 사람들의 행동 양식이나 언어 양식에서 완벽한 방종을 허락해야 할까요, 아니면 강력히 자물쇠를 물려야 할까요 분명히 진자는 왔다갔다 흔들릴 수 있고, 어느 방향으로든 지나치게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명백한 사실은, 어떤 특정 시점에서 우리가 이 방향 혹은 저 방향으로 지나치게 멀리 간것인지 아닌지 여부는 복잡한 정치적 판단의 문제라는 겁니다.


W: 그러면 철학자들이 그런 논쟁에 무언가 보탤 수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철학자들은 스포츠 해석자들처럼 단지 사이드라인 밖에 서서 논평을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B: 저는 두 번째 견해 쪽으로 기울어지는 편입니다. 저는 실질적인 도덕적 논쟁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고 있고, 우리가 달려 들어야 할 매우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예를 들면, 관용의 한계 같은 문제가 그런 문제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면저긴 전문가 의견 같은 것이 존재할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철학자들이 논쟁에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명료성과 조심성이라는 전통적인 덕목들, 주어진 문제가 언제 경험적인 차원의 문제가 되는지를 아는 것, 그 문제가 도덕적인 불일치가 되는 경우는 언제인지 아는 것 등등의 요소들이죠. 그렇지만 도덕의 전문가가 있다는 생각은 정말 인정하기가 망설여집니다. 그리고 확실히, 만일 누군가가 어지간히 복잡한 정치판에서 어떤 해결책을 얻기 위해 철학자를 찾아간다면, 그 사람은 철학자들의 머릿수보다 더 많은 해결책이 난무하는 상황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경제학자들도 그런 소리를 듣곤 하듯이 말이죠. 근본적으로 도덕이란 저 깊은 인격의 표현이자. 삶을 위한 계획들, 우리가 존중하는 국민들을 위한 계획들을 표명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 다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상대주의자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사람들은 다르기 마련이다.>


W: 선생님은 스스로를 준실재론자로 묘사했고, 비록 어떤 차원에서는 도덕적인 문제들에 대한 논쟁이 실질적인 논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들이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이런 도덕적 불일치들을 진정한 불일치라고 말할 수 있죠?


B: 글쎄요. 어떤 차원에서 보면 아주 쉬운 일입니다. 도덕과 무관한 경우를 예로 들어 보죠. 우리가 휴일에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당신은 <산으로 가자>고 하고, 나는 <해변으로 가자>고 말한다고 치죠. 그러면 우리 사이에는 불일치가 생긴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부일치예요. 우리가 오로지 한 곳만 갈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거래를 하든, 협상을 하든,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겠죠. 각자 그곳보다 이곳을 더 좋아하는 이유를 서로에게 제시해야 하는 겁니다. 물론 그러다가 결과적으로 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연인이라면 결별로 이어질 수도 있겠죠. 그렇게 현실적인 문제들에서도 이론적인 문제들에서 만큼이나 똑같이 불일치가 요점이 되는 경우가 매우 흔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사람들이 여우 사냥을 가도로 하고 싶고, 당신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욕망의 차원에서 불일치에 이르게 된 겁니다. 당신은 장차 여우 사냥을 막기 위한 행동을 할 것이고 나는 그 일을 장려하는 행동을 할 겁니다. 우리는 갈등을 빚는 정책들을 가자 갖게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종종 그러는 것처럼 주먹다짐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불일치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면, 그래서 상대주의자가 그 불일치를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애쓰는 광경을 연출한다면, 그때 여전히 상대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짓으로 보이겠죠. 당신은 <여우 사냥 좋아!>라고 말하고 나는 <여우 사냥 안 돼!>라고 말할 때, 로지라는 이름을 가진 상대주의자가 개입해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봐요, 거기 두 사람, 여우 사냥이 나이젤에게는 좋고 사이먼에게는 나쁜 거라는 걸 정말 모르시는 거에요? 그러면 만사형통이라고요>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그런 식의 해결책이 무슨 도움이 되지?> 내가 여우 사냥을 반대한 이유가 무엇이든, 짐작컨대 제 입장에는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당신 또한 그 풍습을 존중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든 여전히 자기 입장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고 있고요. 그런데도 우리가 갈등을 겪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비웃음을 살 뿐이죠. 결국 로지는 갈등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 겁니다. 도움을 준 것도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