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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말했다-김성원

DidISay 2012. 10. 20. 10:41

 

 

 

'라디오천국'을 자주 듣는 사람들이라면

'그녀가 말했다'라는 이 책의 제목이 굉장히 낯익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희열의 목소리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그녀가 말했다'코너의 문장들이 참 좋았었는데

2권의 책으로 출판된 것을 알게 되서 구매해봤다.

 

사실 평소에 이런 가벼운 수필류로 생각되는 책들은

잘못하면 싸이홈피에 쓸만한 글이거나 너무 날림한 느낌이 들 위험성이 있어서

어지간하면 잘 구매하지 않는 편인데,

라디오를 들으면서 인상 깊었던 이야기들이 많기도 했었고

마침 알라딘 적립금도 꽤 많이 남아서 겸사겸사 주문하게 되었다.

 

 

 

음 책의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별삼킨별의 예쁜 사진과 글이 잘 어우러져서

가볍게 들고다니면서 기분전환 겸 읽기 좋았다.

 

사랑이야기만 하거나 심각한 인생의 잠언을 전달하려고 하지 않고,

삶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심야에 진행하는 라디오의 글 답게 문체가 나직하고 감성적이라

차 한잔 홀짝거리면서 읽다보면 주변의 기운이 한톤 가라앉는 느낌이다.

일상의 스쳐가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참 잘 잡아냈구나 싶었던.

 

 

 

증발

 

 

 

 

그녀가 말했다.

 

 

 

"엄마, 왜 내가 키우는 화초는 항상 죽어 버릴까?

가게에서 이건 그냥 물만 주며 된다고, 자주 줄 필요도 없다고 해도,

내가 들고 오면 다 죽어, 그래서 난 화분이 싫어."

 

 

 

그녀의 어머니는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물을 뿌리고 계셨다.

잎 하나하나 앞뒤를 살펴보면서 어머니는 뭐라고 말씀하셨다.

 

 

 

"엄마, 지금 뭐라고 했어? 나한테 한 말이야?"

어머니는 화초를 만지는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그녀에게 말했다.

"사랑이 부족해서 그래, 화초에 사랑을 주지 않으면 물을 줘도 그냥 말라가. 이렇게 화초에 물을 줄 땐, 말을 걸어야지.

너 참 예쁘구나. 오늘은 얼마나 많이 자랐나 보자. 이렇게 말이다."

 

 

 

어머니가 화분을 키우기 시작한 지 벌써 5년이 되었다.

어머니가 꾸민 베란다 온실은 한 잡지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

휑한 집에는 아버지가 키우던 화분들만 남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키우던거니까.' 하는 생각으로 화분을 돌보셨다고 했다.

하지만 몇 번의 실패를 거쳐야 했고,

어머니가 화분을 제대로 키우기까지는 2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는 가끔 아빠가 보고 싶어?"

"너도 화분 하나 가져가서 키워봐. 그럼 남자친구도 생길 거야.

화분을 키우는 건, 사랑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니까."

 

 

 

그녀는 생각했다.

엄마와 난 독같은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희석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하는 순간,

그림움은 조금씩 증발한다.

 

 

 

 


 

겨울 새벽이 너무 깜깜하고 추워서

 

 

 

 

 

 

그녀가 말했다.

 

 

"겨울 새벽은 정말 깜깜해"

 

 

 

 

새벽 5시, 그녀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괴물처럼 달려드는 바람을 맞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어깨에는 두툼한 가방이 매달려 있었고

왼손에는 작은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집을 나서기 전에 꼭 보온병을 준비했는데,

그것은 추위에 맞서는 무기였다.

어쩌다가 보온병을 잊어버리고 나오면 아무리 늦어도

다시 집에 돌아가 보온병에 커피를채워서 나왔다.

그녀는 남극에 가더라도 그 보온병만 있으면

자신이 얼어붙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새벽 5시 13분,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막 버스 한 대가 떠나 버린 터라,

그녀는 우두커니 서서 보온병에 든 커피를 마셨다.

그때 겨울이 코끝에 매달려 이렇게 말을 걸었다.

"왜 이렇게 고생하는 거야? 그냥 따뜻한 집에서 푹 쉬라고."

버스가 힌 시간 넘게 달리는 동안 그녀는 꾸벅꾸벅 졸았다.

 

도서관에 도착해 보니 이미 가장 조용한 자리는

먼저 온 사람들이 차지해 버린 후였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도 완벽한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을 하고 온 여자애들도 있었다.

그녀는 '나는 평생 저렇게는 못할 거야'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새벽 공기가 불러온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고

휴식이 필요하면 먼 산을 한 번 본 후에 기지개를 켰다.

혹시 하루라도 도서관에 가지 않게 되면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가지 않게 될까봐

몸이 아파도, 마음이 아파도, 똑같은 일정을 매일 반복했다.

'끝까지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 때면

그녀는 발걸음을 크게 내딛었다.

 

 

 

 

보온병, 단호한 발걸음, 그리고 약간의 배짱.

지금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