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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크리스토프 바타이유

DidISay 2012. 11. 15. 13:45

 

 

남자인 친구들 몇이 계획을 짜서 무인도나 다름 없는 섬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맞는 여름이었을 것이다.

 

이 섬은 내가 소개해준 장소였는데, 전기도 수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곳이라

여자들끼리 가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남자아이 6명으로 짜여진 이 여행객들은 3일을 묵을 작정으로

그만큼의 라면과 술. 버너와 캠핑도구들을 갖추고 그 섬으로 갔다.

모험놀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MTB도 챙겨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배터리도 충전하기 어려운 곳이라 연락이 힘들 것이란 건 예상했기 때문에,

여행 다녀오면 후일담이나 들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날씨가 너무 안좋아서 배가 뜨지 않아

예정보다 2일정도 더 섬에 머물렀다고 했다.

 

다행히 완전히 무인도는 아니고 개인사유지인 곳이라 관리하시는 분이 계셨고,

먹을 것도 넉넉하게 가져간 편이라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인터넷이나 전화가 모두 끊긴 상태로 5일을 있었다는 것.

작은 섬에서 하루종일 뭔가를 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것 정도.

 

 

 

다들 경악을 하는 우리의 표정과는 달리.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지루함이나 고생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모기에 물려 부은 정강이나 넘어져서 다친 영광의 상처 외엔

오히려 더 건강하고 반짝반짝 생기가 넘쳐 보였다. 

 

초여름의 햇빛에 까맣게 그슬린 얼굴로

비 내리는 가운데 섬 구석구석을 자전거로 다닌 이야기며

보드게임을 하며 보낸 하루를 털어놓기 시작했는데

그다지 특별할 것 없고 지루해보이기까지 한 그 일정들이

육지의 삶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기분이라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모든 것이 차단된 상태에서 오히려 평안해진 마음.

그래서 많은 돈을 쓰고 화려하게 보낸 휴가 보다

오히려 진정한 쉼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실연을 당해서 죽을 것 같다는 마음도

어지러운 가정사 때문에 심란해하던 마음도

잠시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해 온 것 같았다.

 

 

 

 

 

 

...죽음은 흔한 것이지만 고독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는 속이 빈 조가비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부들은 복음서를 경청했다. 그리고 여전히 계속하여 그들의 옛 신들을 믿었다. 베트남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은 채 다 간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영원 속에서 한데 뒤섞였다.
...오직 두 사람의 선교사만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채, 그리고 스스로를 잊은 채 살아 남아 있었다.

 

 

 

....“그들의 영혼은 헐벗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군더더기 없는 핵심만이 남았다.” 

 

..."우리 친구들은 우리를 잊어버렸고 하느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군요, 노인."

 

 

크리스토프 바타이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번역자 김화영님에 의해서 널리 알려졌고,

작품 자체의 무게 보다는 오히려 번역자의 극찬이 더 유명한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감이 별로 생기지 않는 것이,

책 뒤편에 실린 역자의 평은 그만큼 깊이 있고 작품에 대한 애정이 한껏 느껴진다.

 

 

 

 

 

 

일곱 살 된 어린 베트남 황제 칸이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궁에 도착한다. 그는 군대와 선교사들을 보내어 힘으로 하느님의 왕국을 회복해 달라고 간청하고, 곧 폐렴에 걸려 죽게 된다. 세월이 흐르고 남녀로 구성된 프랑스 선교사들이 베트남을 향해 배를 타고 떠난다. 그들은 일 년이 넘게 걸려서 사이콩에 도착해 남쪽 지방의 농사꾼에게 복음을 전파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나고, 어수선한 가운데 프랑스는 동방으로 떠난 선교사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선교사들은 그 동안 배운 모든 것을 버리고 처음부터 새롭게 배워가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의 줄거리는 위와 같은데, 내용만 놓고 본다면

선교사들과 관련된 기독교 서적과 비슷한 느낌이기도 하다.

그렇게 흥미롭지 않은. 그저그런 이야기 같달까.

 

하지만 실제로 이 소설을 읽어본다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선교'가 아니라 '죽음'과 '사랑'이다.

일곱살된 베트남 황제는 프랑스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사망한다.

 

이에 대한 미안함이었는지, 안타까움이었는지.

은퇴한 늙은 주교가 파견한 선교사들은 베트남으로 출발하지만

곧 이를 계획한 주교들도, 왕과 교구 사람들도 프랑스 대혁명의 피바람 아래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

선교단 역시 베트남까지 향하는 그 여정에서 많은 수의 사람을 잃는다.

 

울창하다 못해 빽빽하게 잎들이 들어찬 커다란 밀림과

땀이 흐르고 열병에 시달리게 하는 습하고 숨막히는 날씨.

온갖 신과 축제를 사랑하는 소박한 사람들

이 베트남에서 선교사들은 교리문답을 하고 성경을 읽는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은 이 평화롭고 빛나는 머리를 가진 외국인들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말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 속에서는 베트남 고유의 문화가 살아 있다.

 

 

 

 

희망 없는 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개척하기로 마음 먹은 세명의 선교사는 다시 길을 떠나고

이들이 떠난 자리는 다시 피바람이 불어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한명의 동료가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결국 남은 것은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느 수녀.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프랑스에서 남아 있는 선교사 명단마저 불타서 사라져 버렸다.

 

 

 

 

 

이 책에서는 사랑하는 동료가 죽거나, 대량의 학살이 있었을 때

헤엄을 치거나 목욕을 하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마치 예수의 침례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들이 거듭될 때마다,

이들을 감싸고 있던 무거운 의식들....

매일의 기도, 교리문답, 성경구절들의 암송,

온몸을 꽁꽁 싸매고 감정을 억제하는 옷과 생활방식들은

점점 해체되고 희미해지고 사라져간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를 하느님의 자녀나 교리를 전달한 동료가 아닌

한 사람. 여자와 남자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하느님의 뜻을 알도록 계몽시켜야 할 베트남인들도

그저 삶을 사랑하고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로 변화한다.

 

 

 

 

 

"남자는 젊은 여자의 젖가슴 위에 손을 얹어놓고 있었다. 여자의 배는 땀과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을 했던 것이다. 깊은 정적만이 깃들어 있었다. (…) 성직자들의 태연하기만 한 모습과 창백함에 군인들은 감동했다."

 

 

 

베트남에서 최후의 선교사들을 죽이기 위해 병사들을 파견했을 때,

그들이 목격한 것은 매섭고 성마른 목소리의 수도자들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랑을 나눠 기진맥진한 한쌍의 아름다운 남녀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복수의 칼날이 아닌, 질병으로 함께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하느님이 아닌 인간의 사랑을 발견한 채로.

그리고 이들은 순교자로 기억되거나, 수도자로 기억되는 일 없이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이 책의 구성상 특징은, 이들의 죽음을 먼저 묘사하고

병사들이 목격한 이들의 사랑을 나중에 묘사한 입체적 구성이라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베트남 상황과 온갖 죽음으로 시작한 이 책의 마지막이

복수와 증오를 비켜지나가게 한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이 작품의 매력의 거의 절반 이상은 아름다운 문장이나 매끄러운 수식어 없이,

간결하고 건조하게 느껴질만큼 짧게 서술된 단문들이다.

 

한줄 이상을 넘어가는 문장이 거의 없을만큼

호흡이 뚝뚝 끊겨서 매우 객관적이고 감정이 절제된 느낌인데,

그 속에서 묘사하는 것들은 또 피비린내 나는 죽음들과 사랑이라니 흥미롭다.

 

그래서 이들의 행위들은 신파적이지도 감격적이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고 조용한 느낌이다.

물빛 도는 얼굴로 그저 지켜보는 사내의 시선.

 

 

 

 

 

우리는 하루하루의 고통을 잊기 위해

혹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써서 상담을 받기도 하고

미친듯이 어떤 것에 매달려 탐닉하거나 중독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갈등과 허무를 없애려고, 신이나 물질에 자신의 온 삶을 걸어본다.

 

하지만 많은 문학작품 심지어 성경에서도 가장 최후에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사랑의 형태야 각자 다를지라도.

 

모든 것이 차단된 상태에서 기존의 자신을 다 지워야

진정한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역설은 불교의 해탈과도 맞닿아 있다.

 

해소되지 않는 일상의 번뇌는

나를 얼마나 지워야 해소될 수 있을까. 

 

마음이 힘들 때는 선교사들이 최후에 머물렀던

산기슭에는 코끼리가, 울창한 그늘 속에는 호랑이가 존재하던

그 높고 습한. 비내리는 고산지대의 마을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