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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레이먼드 카버

DidISay 2012. 11. 15. 01:13

 

 

 

오늘은 그간 단숨에 읽히지 않아 꽤 애를 먹었던 책을 갈무리 하려고 한다.

앞으로 카버의 소설이나 영화를 몇 번 더 평할 계획이라

이번엔 좀 길게 카버에 대해서 서술할 생각이다.

 

 

 

"그는 계속 '나는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이년아"라고 말했어요. 그는 계속 나를 질질 끌고 돌아다녔죠. 내 머리는 계속 뭔가에 부딪혔어요."

...

"그런 사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

"맙소사, 멍청한 소리 마, 그건 사랑이 아냐. 당신도 그렇다는걸 알고 있어."

....

"당신이 뭐라 해도,난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알아요...아마 자기 방식대로였겠지만, 사랑은 있었어요."

....

 

 

그런데 끔찍한 건, 정말 끔찍한 건, 한편으로는 좋기도 한 건데, 우리를 구원할 어떤 은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 만약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바로 내일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 그러니까 다른 한쪽은 한동안 슬퍼하다가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곧 다른 누군가를 만나 다시 사랑을 하게 될거라는 거야. 그러면 이 모든 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모든 사랑이 그냥 추억이 되겠지. 어쩌면 추억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어.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 中

 

 

 

레이먼드 카버는 여러가지 극찬이 따라다니는 작가이다.

조금만 시간을 내서 찾아본다면, 그를 가리켜 아메리카의 체호프

혹은 완벽한 단편소설가라고 칭한 평론가의 평들을 쉽게 읽어볼 수 있다.

누군가는  '그는 첫 작품부터 레이먼드 카버였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작품의 전후가 뚝뚝 잘린 느낌을 주며,

결정적인 순간을 잡아낸다기 보다는 그 직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소설의 단계라면

언제나 위기에서 멈추거나. 절정만 다루거나. 흐릿한 결말만 제시된다.

그런 이유로 한번에 술술 읽힌다거나 강렬한 인상을 준다고 말하긴 어렵다.

 

아마 그의 작품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뭐야? 이게 끝이야? 하며

끝나버린 책장을 의심스럽게 응시하기 쉬울거라 생각한다.

그만큼 쉽게 주제나 그럴듯한 영감을 도출해내기에도 꽤 불친절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래오래 작품을 두번세번 입안에서 우물거릴 수 있다.

아주 얇은 여러겹의 투명한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나가는 그런 종류의 즐거움.

 

소설가 김영하씨가 카버의 '뚱보'를 팟캐스트에서 소개하면서,

주제를 찾아내는 국어교육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는데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

 

주제 그 자체보다 이를 찾아내고 즐기는 과정과 시간이 중요한 것이다.

된장처럼 오랜 시간 우려내고 숙성시키는 존재.

여러차례 되씹는 맛이 있는 작품.

그리고 씹을 때마다 새로운 문학이 가치 있다.

 

 

만약 그의 작품을 좀더 쉽게 접근하고 싶다면, 그의 작품을 엮어 영화화 한

Everything Must Go 나 Short Cuts을 감상해보길 바란다.

 

 

 

 

 

사실 한국처럼 미국 역시 주류작가들은 대부분 장편소설가들이고

단편소설들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간 고인이 된 작가들 위주로 알려져 있다.

 

카버는 정규교육을 통해 차근차근 여유를 가지며 글을 써온 작가가 아니었고,

생계를 해결하고 알콜중독과 싸우면서 전투를 하듯 짬짬이 작문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장편소설을 쓰기엔 삶이 너무 여유가 없어서, 단편소설을 써냈다고 말하는데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커다란 장편소설에서 일부분만 뚝 떼서 이 작품을  만든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주류의 중심에 서있는 것도 아닌 작가가 어떻게 한국에 이렇게 알려지게 된 것일까?

한국에 이 작가를 널리 알린 가장 큰 공신은, 바로 무라야미 하루키다.

하루키는 레이먼드 카버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여러 수필을 통해서 그의 이름을 언급했고

일본에 소개된 카버의 책들은 모두 하루키에 의해 번역된 바 있었다.

 

하루키가 카버를 어느정도 좋아했는가는, 그의 글에서 배어 나오는 카버에 대한 강한 팬심 외에도

그를 인터뷰한 후 카버를 일본으로 초청하였고 그가 이를 수락하자,

카버가 자신의 집에 묵을 때를 대비해서

카버를 위한 커다란 침대를 주문제작했다는 일화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카버는 폐암의 전이로 일본에 방문하진 못했다) 

 

 

 

 

한국에서 하루키와 비슷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번역가는 소설가 김연수인데,

문학동네에서 나온 카버의 4번째 소설집 중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를 그가 번역하게 되서

독자층들의 기대를 모은 바 있다.

 

문학동네에서 3권의 소설전집이 나오기 전에는,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는 아직 안나온건지 서점에서 찾을 수가 없다 -_-)

집사재 출판사를 통해서 카버의 작품들이 출간되었는데

여기엔 각 작품마다 하루키가 간단하게 평한 해설들이 실려 있고

하루키와 카버의 인터뷰 역시 담겨 있었다.

(하루키의 '잡문집'에도 다수 실려 있으니, 참고할 것)

 

 

 

 

하지만 집사재와 문학동네의 번역의 뉘앙스나 단어가 심하게 달라서

소설 흐름을 바꿔놓을 지경이라. 원문을 직접 읽어봐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집사재는 한 분이 모두 번역을 하셔서 문체가 일정하고,

문학동네는 각 책마다 번역자가 달라 좀 차이가 있다,

 

좀더 읽기 쉬운건 집사재인데. 음. 더 좋은 번역이라고는 말을 못하겠다.

개인적으로 집사재판은 하루키와 너무 느낌이 비슷해서,

하루키가 일역한 것을 다시 번역한 것인가 싶었는데 또 그건 아니고 -_-;;

 

 

 

집사재와 문학동네의 또다른 차이점은 집사재는 카버 단편들을

출판사 나름으로 선정하여 3권의 책으로 냈다는 것이고,

문학동네는 카버의 단편집 4권을 원서 그대로 제목과 목차를 가져왔다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문학동네의 방식이 더 맞았다고 본다.[각주:1]

 

 

왜냐하면 카버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특히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하 사우이)은

카버가 작품의 구성을 매우 세심하게 신경쓴 책이고

때문에 소설과 소설 사이의 순서와 흐름은

카버의 계산에 의해 조절된 것이기 때문이다.[각주:2]

 

 

 

 

이 소설집은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작가의 개인적인 삶의 흔적이 많이 녹아있다.

 

사냥과 낚시를 즐겼던 카버와 그의 아버지.

알콜중독에 빠지고 아내와 결별했던 지옥같은 상황들.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가난한 어린 시절의 기억들

아버지와 카버가 일했던 제재소..등등

 

이 배경 속의 인물들은 오랜 시간을 보낸 가족이자 친구였지만,

결코 그의 충동이나 본성을 마지막 순간까지 이해하지 못했고

서로의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누군가에게는 인생 최대의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다른 사람은 그저 귀찮고 따분한 대화일 뿐이다

이들은 염증과 불안을 느끼면서도 위태롭게 일상을 유지한다.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Room in New-York

 

 

카버의 작품을 읽다 보면 언제나 호퍼의 그림이 생각나는데,

단절된 인물들, 미세한 균열이 생긴 삶, 서로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하는 인간관계

이 소외되고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감이 꼭 닮아 있다.

 

호퍼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생각보다 작고 초라해서 좀 놀랐었는데

이상하게도 전시회를 나왔을 때 가장 많이 생각난건 그의 그림이었다.

카버의 작품 역시.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과 막막함에도

잊고 지낸  삶의 어느 순간에서 내 발목을 움켜쥔다.

 

 

 

 

 

각 소설에서 밑줄 쳤던 부분들. 혹은 이해하는데 중심이 된 문장들.

같은 문단으로 묶여 있는 것은, 동일 소설안에 등장하는 부분.

 

 

 

 

 

 

  1. (이런 차이 때문에 생긴 문제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실린 단편은 "The Bath"이다. 이를 그대로 옮긴 문학동네 편에서 부모와 제빵사는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집사재에서 나온 작품 "A Small, Good Thing"에서는 부모와 제빵사가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작품은 원래 단편집 Cathedral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인데, 카버는 이 단편집에서 "The Bath"의 결말을 덧붙여 "A Small, Good Thing"로 발표했었다. 그런데 집사재에서 이것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실어버리는 바람에 독자 입장에서는 매우 혼란이.;;;) [본문으로]
  2. 참고할만한 카버의 인터뷰는 이 블로그내에서 검색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