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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을-박솔뫼

DidISay 2013. 1. 10. 03:10

 

 

 

제1회 자음과 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인 소설.

작가인 박솔뫼 씨가 등장했던 팟캐스트를 듣고 찾아 읽게 되었다.

 

나와 동갑인 작가의 이력을 읽고,

아 이제 드디어 내가 속한 세대에서도 주목받는 작가들이 등장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와 동일한 시대를 살아온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의 틀은 어떠한지.

어떤 사다리를 놓고 어느정도의 높이에서 세계를 관찰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작은 포켓북 사이즈라 금방 읽겠다 싶었지만, 초반부에서부터 약간의 혼란을 느껴야 했다.

보통 소설을 읽을 때 인물들의 성격과 관계를 대략 정리하고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는 편인데,

국적도 인종도 성격도 살아온 인생도 모두 베일에 싸여있는 작품 속 상황에 적응해야했기 때문이다.

이름 역시 성별이 잘 매치되지 않아서, '을'은 여자주인공, '민주'는 남자주인공의 이름이다.

 

게다가 이 소설은 '서사문학이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정의를 무색하게 만든다.

모든 사건과 행동들이 목표도 지향점도 없으며, 인과관계는 뚜렷하지 못하며

갈등 역시 전면에 등장하지 않은 채 모호하게 흘러간다.

 

 

 

 

이민주가 방을 떠났다.

 '민주'하고 불러주던 목소리가 있던 방이었다. 이민주는 방을 떠남으로 더 이상 '민주'일 수 없었다. 이제 누가 그를 '민주'하고 불러줄까. 그 목소리는 이제 그에게 닿지 못한 채 방에 남는다.

 

 

소설의 첫 시작이 떠남이었듯, 이 소설의 끝도 떠남이다.

 

'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이,성별, 집안, 인종 등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보이며

그 어떤 사회적인 제약에서도 한발자국 물러나 있는 제3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히피들처럼 그런 제약들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바삭바삭한 종이인형 같은 느낌.

 


 

이 소설은 장기투숙객들이 많은 한 외국의 호텔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 살고 있는 주인공격인 사람들은 모두 소통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언어에 머물러 있다.

고립이 아닌 그저 평온하고 만족하며, 그 안에서 머무르는 상태.

 

....민주는 그 모든 것들을 그 겨울 이후 떠올리지 않았다. 어떤 시간들은 지나고 나면 되살리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그 순간이 이미 어떤 완성이기 때문이다. 방금 전의 꿈도 그렇다. 그것은 꿈을 꾸는 당시에는 온전했다. 그때의 시간처럼 말이다.

 

.... 을은 오히려 달변가들을 지겨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왜 그런 사람들을 근사하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 을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만나면 손을 뒤로 묶고 입을 바늘로 꿰매서 쓰레기차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물론 속으로 말이다. 을은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인데 왜 이렇게 말이 없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쓰레기차에 함께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쪽이 말이 많으신 겁니다. 을은 늘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어쨌거나 을은 늘 정중했다....을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싫었지만 도시는 언제나 좋았다. 흰색과 검은색의 빽빽함, 건물들은 침묵을 지키고 자동차들은 예측할 수 있는 소리를 냈다. 을은 도시가 갖고 있는 기계적임에서 안정을 찾았다.  

 

 

언어 자체보다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변함없는 규칙성을 사랑하며,

자연의 소리보다는 공장의 규칙적인 기계음에 끌리는 인물들.

이들은 끊임없이 여행하는 이방인의 위치를 고수하며,

그 어디에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거나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때문에 '을'의 인물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누군가에게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통하려 한다.

하지만 완벽해보이던 이들의 관계는 제3가 개입되는 순간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한편으로 이들은 각자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오직 자신만이 소통하고 있던 그 완벽한 대상이 변질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타인이 개입되는 순간 이들은 자신이 자유롭던 사회의 시선에 갑자기 얽매여버린다.

그리고 관계는 스르륵 소멸된다.

 

 

 

 

문제는 이들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방식이나, 파괴되는 과정이 극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모든 것이 모호하며 단문으로 처리되고 암시되어 있을 뿐이라

굉장히 건조하고 단촐한 소설이다. 언제나 정점에서 살짝 비켜난 장면만을 보여준다.

여기저기 여백을 남겨둔 추상화를 보는 느낌.

 

 

이 소설의 주된 줄기를 보여주는 것은 '씨안'이 반복적으로 보는 이 영화에 있는데,

보면서 영화 '블루라군'이 생각났다. 타인이 나타나자마자 파괴되어 버린 그들만의 완벽한 낙원.

 

  부녀는 예전처럼 서로를 물고 빨며 뒹굴 수 없었다. 세 사람은 함께 걸어서 가게에 갔다. 그리고 음식과 옷, 휴지 등을 예전처럼 쓸어 담았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 그것들을 나눠 먹었다. 그들은 음식을 나눠 먹으며,  '더 먼 곳에 있는 가게를 가야 하지 않나', '기름과 가스를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 '농사를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같은 건설적인 주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했다. 그들은 매일 매일을 건설적으로 또한 건강하게 보냈다. (....) 두 명이 있을 때는 다른 할 일이 없다는 듯 뒤엉켜 뒹굴기만 했으나 세 명이 되자 그들은 나라라도 세울 듯이 열심히 일했다. 머릿속으로는 인류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비자하며 가슴 떨리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비장하며 건설적이고 청교도처럼 부지런한 날들이 흘렀다. 이때 깔린 음악은 스미스의 <how soon is now>였다. 그들은 모리세이의 목소리에 맞춰 쓸고 찾고 망치질하며 일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이었다. 깊은 밤이었다. 스미스의 <how soon is now>는 계속 깔렸다. 노동 후 피곤했던 그들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누군가가 살며시 일어나 어둠 속에서 칼을 들어 누군가를 찔렀다. 푹 하고 찌르는 소리와 끅 하는 비명이 짧게 순차적으로 들렀다. 또 다른 한 명은 가만히 일어나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을 들었던 이는 죽은 이의 시체를 질질질 끌고 나갔다. 모리세이는 계속 노래를 부른다. 방 안에는 다시 두 사람이다. 그들은 짙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엉겨 붙어 뒹굴었다.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 두 사람이 아버지와 딸인지 딸과 젊은 남자인지 젊은 남자와 아버지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열심히 뒹굴었고 그 뒤로 모리세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음악들.

소설 속에 스미스의 음악이 게속해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