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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장날엔 할머니 냄새가 난다.

DidISay 2012. 1. 22. 02:43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하늘이지만

 

그래도 밤에 잠깐 내린 비덕분인지

 

선선해진 날씨에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과외를 마치고 길을 걷는데

 

할머니 두분이 길거리에서 얘기를 나누고 계신다.

 

한분은 색색의 머리끈과 핀을 앞에 두고

 

한분은 양배추와 가지와 옥수수를 앞에 두고

 

그렇게 차들이 앞을 향해 쌩썡 질주하는 길가에 앉아계셨다.

 

두분 앞에 놓인 것은 다르지만

 

펼쳐놓은 색바랜 갈색 천들과

 

이마와 빰에 깊게 드리워진

 

짙은 주름살과 삶의 흔적들은 무척이나 닮아보였다.

 

그 얼굴 곳곳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을까.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그분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에 젖어 들었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나비와 꽃모양의 머리끈과 

 

먹기싫어해서 항상 혼이 나던 가지..

 

그리고 그분들의 손에 패인 주름살에

 

아직은 하얗고 반질한 내 손이 부끄러웠다.

 

키가 크고 나이가 껑충 들어버렸지만

 

적게가진 것과 나이듦을 초라하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배워가고 있는 내가 창피하고 싫었다.

 

우린 어쩌면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하는

 

늙어감..이라는 현실을

 

잊고싶고 외면하고 싶어서..

 

그렇게 모른척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주름이 생기고 작아질 수 있다는 것이

 

무서워서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우리는 지금 이순간에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주름과 연륜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분의 작은 어깨가 환한 하늘과 너무 대비되어 보여서

 

할머니와 엄마 생각에 또 울컥해져

 

가만히 앉아 한참동안이나

 

야채랑 머리끈을 만지작거리다

 

학원이나 조카아이들을 줄 생각으로 몇개 골라들었다.

 

야채는 허기진 나의 빈속을 채워줄 것이고

 

머리끈은 아이들에게 작은 추억을 만들어주겠지..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던 보라색 나비모양 핀처럼...

 

어릴적 할머니 품에 뛰어들어 노래를 부르거나

 

아파서 할머니 가슴에 빰을 묻고 잠이 들때

 

그 알싸하게 느껴지던 할머니 냄새가 그립다.

 

따뜻했던 그 내음...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제 곁에 오래오래 있어주세요.

 

 

(photo by 냉최, 춘천풍물시장 '장날엔 할머니 냄새가 난다')


-06년도에 작성된 글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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