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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정이현

DidISay 2013. 10. 11. 13:43

 

2007년에 나온 정이현의 단편소설집.

 

단편소설집의 제목은 보통 그 책에 실린 작품 중 하나를 따서 짓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오늘의 거짓말'은 단순히 '수록작품의 타이틀 중 일부'보다는 좀더 큰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 소설 속 모든 사람들은 기만과 위선, 허구와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과거에도. 오늘도. 미래에도 계속해서 그 거짓말들을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니 꽤 심각한 소설같은 인상을 주게 되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읽는 내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이 떠올랐는데,

정이현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 습작 초기부터 존 차버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의 영향을 많이 읽었고

'도시인들의 부스러진 일상을 다루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의 거짓말' 속 주인공들은 모두 하나의 사건을 겪는다.

삼풍백화점의 붕괴처럼 커다란 사건부터 동창과의 만남까지 그 사건의 성격은 제각각이지만

그 이후로 인물들의 삶에는 균열이 생기게 되며,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일상으로 그들은 결코 돌아갈 수 없으리란 것을 독자들은 직감한다.

 

 

 

 

'타인의 고독'

 

7년을 사귀고 7개월만에 결혼생활을 끝낸 34의 이혼남. 결혼정보회사 등급 B+.

책임을 회피하고 어떤 적극성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인물의 특징인데,

전부인 주희가 결혼생활에서 남은 유일한 부산물일 강아지를 맡아달라고 할 때 모른척 할 때도,

그리고 주희와 함께 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칠 때도 그 성격이 여지없이 나타난다.

 

'결혼'이라는 중요한 인생의 순간을 위한 만남은 너무나 계산적이거나 형식적이며

누군가의 삶을 파괴했을지도 모를 교통사고 뒤에도 이들의 대화는 건조하다.

식사는 배달로, 인간관계는 결혼정보회사로. 성욕을 마스터베이션으로 해결하는..

심지어 머리까지 가발이라는 거짓으로 점철된 일상들.

 

주희에게 떠맡게 된 강아지에게 일순 애정을 느끼는가 싶더니,

결국은 이 관계를 지금 끝장내 버리더라도 그 어떤 슬픔도 느끼지 않으리라 상상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는 어떤 변화도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

 

'삼풍백화점'

 

20대 중반의 주인공은 쇼핑 중에 백화점 점원인 고교 동창 R과 우연히 마주친다.

그녀와 R은 똑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사실 사회적인 위치는 많이 다르다.

 

R은 고교졸업 후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강북의 단촐한 집에서 혼자 살고 있고

그녀는 대학을 졸업했고 부모님과 함께 강남의 아파트에서 중산층의 삶을 살아간다.

취업준비 중이긴 하지만,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R과는 달리 아직 용돈을 받고 있고

백화점에서 소소한 쇼핑을 하고 카페에 갈 정도의 여유는 있다.

 

칼 같이 더치페이를 하던 대학동창생과는 달리 R은 좀더 촌스러우면서도 끈끈한 우정을 보여주는데,

R은 그녀가 돈이 없을거라 배려해 먼저 일방적으로 식사를 사주고

그녀에게 자신의 집 열쇠를 맡기며 낮에 갈 곳이 없다면 이곳에서 놀다 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R의 이런 우정을 다소 부담스럽게 느끼며 단한번도 그 집을 혼자 방문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R은 그저 시간이 날 때 보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싶은 타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격차를 여실히 느끼게 된 백화점 임시아르바이트를 처참하게 끝낸 뒤

그녀는 어느 회사 정규직에 취직하고 증권사에 다니는 남자친구를 다니며 R을 잊어간다.

 

어느날 R이 일하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그녀의 은밀한 죄책감도 함께 붕괴된다.

그녀는 회사도 나가지 못하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이어나가지 못하면서도,

R에게 먼저 연락하거나 사망자 명단을 확인하는 용기를 내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몇가지 일화들이 생각나서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는데

그렇게 수년간 매일매일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이 서로 다른 대학을 가고

졸업 후에 너무 차이가 나는 가정환경이 그대로 노출 되어버리니

그 뒤엔 공통화제도, 생활반경도 공통점이 사라져 점점 멀어지게 되더라...

 

나도 그리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아닌지라,

사실 속으로는 촌스럽고 다정한 관계에 대한 욕구가 있으면서도

새로 알게된 누군가에게 그렇게 일방적인 애정을 보여주려고 하면 멈칫. 하고 브레이크가 걸린다.

내 애정이 거절당할 것이.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 무서운걸지도.

그래서 결국은 적당히 건조하고 깔끔한 도시적인 관계만을 맺게 된다..

 

'어금니'

 

49살의 부유한 여자. 남편과 아들이 잔정은 없어보이지만,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여유롭고 평온한 삶이다. 품위와 격식을 따지는 가족들.

 

어금니를 치료하러간 생일날 아들 현우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녀의 삶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훤칠한 키에 명문대를 다니던 그녀의 아들은 미성년자와 원조교제를 즐기는 쓰레기였고

옆자리에 앉아있던 소녀가 죽었음에도 양심의 가책이나 반성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생사 여부를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남편은 그것이 잘못된 일인지 알면서도 돈과 인맥을 동원해 아들을 보호한다.

그녀는 '예의를 다해 피해자의 영정 앞에 머리를 숙여 용서를 비는 것'으로 죄책감을 털어버린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는 타인들의 삶이라고 저멀리 치워버린다.

이 부부는 아들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고, 이 사건에 대해 깊은 대화를 하지 않고 피한다.

 

고급 한우를 먹고 유기농 상추를 섭취하지만,

그녀의 뽑아버려 텅 빈 어금니처럼 그녀의 마음은 공허하다.

 

 

'아마도 나는, 나와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거짓말'

 

인터넷 쇼핑몰에 가짜 후기를 쓰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여자.

그녀의 주변인들은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계속 다른 모습이 되기를 원하며,

그녀 역시 가족이나 애인에게 자신의 본모습이나 진심을  드러내지 않고 관계를 맺는다.

 

어느날 소음으로 윗층을 찾아간 주인공은 박통과 똑같은 모습의 노인을 마주하고,

소음의 정체가 노인이 자신의 가짜후기 때문에 구입한 러닝머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모든 거짓된 일상을 깨기로 결심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집을 나와 1979년의 삶에 대해 책을 읽어 보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어떤 새로운 것을 알게 될까?

 

'그 남자의 리허설'

 

한때는 원대한 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저냥한 삶을 살아가는 테너.

성공한 아내 덕에 괜찮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그의 직장은 언제 재계약이 끝날지 몰라 불안하며

소유물에 대해 그는 어떤 재산권도 주장할 수 없음을 안다.

 

아파트키를 잊어버려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건이 터지고, 그의 불안감은 지독한 악취로 나타난다.

자신에게 악취가 나는지 나지 않는지의 여부로 계속해서 불안해하며  방황하는 남자.

 

자신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안겨준 '남효준'과 아내가 함께 일하지만,

그는 그날의 악몽에 대해 아내에게 털어놓지도, 남효준에게 따지지도 못한다.

 

아내의 부정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오델로처럼,
그는 아파트 깊숙한 곳의 욕조로 도망쳐버린다.

 

'비밀과외'

 

1985년 어느날. 중학교에 입학한 소녀는 비밀과외를 하게 된다.

 

시절은 하수상해서 대학생들은 데모를 하고, 공중에는 꽃가루와 함께 최루탄 입자가 날린다.

하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일상은 흘러가고

그녀의 어머니는 밀수라는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 가족을 먹여살리고,

운동권 대학생들을 과외선생으로 고용한다.

 

어느날 현실에 지쳐 집을 나간 어머니처럼,

대학생들은 데모를 하다 끌려가 그녀의 삶 속에서 사라져간다.

 

 

80년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브랜드나 모습들이 나와서 꽤 재밌었는데,

1985년은 내가 태어난 해이기에 궁금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없으므로 더더욱 그러하다.

그리우면서도. 동시에 떠올리면 마음이 아플 것 같은 이율배반적인 느낌.

 

'빛의 제국'

 

2022년 미래. 2004년 비원여고라는 소년원에서 자살한 소녀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게 된 연구원.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상은 적당히 타락해 있고, 권력자들은 부패하다.

 

김영하의 소설 제목과 똑같아서 처음엔 어? 하는 느낌이었는데,

르네 마그리트의 이 연작시리즈를 소설가들이 참 많이 좋아하는구나 싶네.

 

'위험한 독신녀'

 

38살인데도 25살의 나이에 머물러 버린 여자.

예쁘고 집안이 좋지만, 순진하고 눈치가 없었던 것이 죄라고 해야하나..

 

사회는 너무나 가혹했고,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거짓된 환상 속에 머물러 버린다.

 

 

 

 

'부정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응징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녀가 62명 중에 62등이라는 것은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어도 언제든 알려질 비밀이었다. 그 소문이 산불처럼 번지는 데 대해 나는 별다른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대걸레라는 별명을 붙인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채린의 뒤에 대걸레와 주전자 밖에 없잖아, 라고 커다랗게 말했을 뿐이다. 그 말 속에 들어있던 악의를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단정하고 규범적인 소녀라면 누구나 그녀에 대해 그만큼의 악의는 품고 있었을 것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타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다.'

 

 

'어두워지기 전에'

 

맞선으로 조건을 맞춰 결혼한 섹스리스 부부.

무미건조하지만 평온한 일상에 그녀는 별불만이 없다.

그러던 중 윗집에 유아살해사건이 일어나고, 그녀는 유아연쇄살인범으로 남편을 의심한다.

 

하지만 남편은 살인이 아닌 사내불륜을 저지르는 상태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윗집 여자가 사건을 극복하고 새로 임신해 변화를 꿈꾸는 것에 반해,

그녀는 남편의 불륜이 아닌 그들의 '열정'을 질투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새로운 관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임신을 해야한다고 자신의 마음을 속인다.

 

'익명의 당신에게'

 

한밤중. 환자의 항문을 찍고 달아난 변태적인 사건이 어느 대학병원에 발생한다.

이 대학의 치과의사와 교제하던 임상병리사 연희는, 남자친구가 범인임을 알지만

자신과 남자친구의 안위를 위해 사건을 조작한다.

 

이를 사랑을 위해. 라고 스스로 위안하지만, 그는 사랑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

실제로는 부적절한 욕망 때문일게다. 결국은 모두 돈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