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천사들의 도시-조해진 본문

소리내어 책 읽기

천사들의 도시-조해진

DidISay 2013. 10. 31. 05:01

조해진님의 소설에는, 세상 한 귀퉁이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 없이 외롭지만,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하는 사람. 말이 없고 고요한 시선들.

자신의 삶에 몰입하지도,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지도 못하는 완벽한 타자.

 

그래서일까. 얇고 빳빳한 책장을 넘기는 내내, 낮고 건조한 목소리를 가진 익명의 화자가

내 눈을 빌려 책을 읽어내려 가는 듯한 환청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건조함에 질려 문장을 급하게 치워버리려 할 때,

언제나 그 목소리는 나를 다시 붙잡아 호흡을 고르게 해줬다. 

 

 

 

 

사실 '천사들의 도시'를 작년에 구매하려고 했지만, 절판된 상태라 보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재출간 되었다는 소식에 다급하게 마우스를 움직여 구매버튼을 눌렀다.  

한달음에 읽겠다고 두근거렸던 시간들.

 

하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풍기는 외로움 때문에

읽는 속도는 한없이 느릿했고 마음이 쉴새없이 아파서

이 소설을 만난 것이 기쁘기도. 대책없이 슬프기도 했다.

 

 

언제나 그 쓸쓸함에 두터운 스웨터와 전기담요의 온기 속으로 들어가게 했던 이야기들.

이 책은 7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건 '천사들의 도시' 그리고 '기념사진'이다.

 

개인적으로 '천사들의 도시'는 문장이 아주 정교하고 섬세해서, 

오정희님의 '완구점 여인'과 흡사한 느낌. 읽는 내내 자꾸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출근길에서 그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느 때처럼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횡단보도를 뛰어가던 나는 누구에겐가 뒷덜미라도 잡힌 듯 문득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날을 생각한다. 그날을 기점을 우리는 다시 타인이 되기 위해, 혼자 남기 위해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너에게 왜 그날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서른두 살에도 다섯 살의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걸 표현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 듣는 것조차 평가라도 받듯 타인을 의식해야 했던 너를 보는 게 내겐 인내였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새 신호들이 바뀌고, 나는 횡단 보도 한가운데 혼자 서서 숨을 고른다. 차들의 클랙슨 소리, 사람들의 무심한 듯 의아한 시선, 어딘가로 가야 하지만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막막함. 그 순간 종소리를 들었던가. 물론 환청과 실제를 가르는 정확한 지점을 표현할 언어는, 내겐 없다. 나는 다만 네가 나를 떠난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그렇듯 무력하고 연약한 언어에 기대어 가까스로 생각할 뿐이었다. 그날 우리는 분명 비겁했다고, 서로에게 필요한 것은 배려를 가장한 침묵이 아니라 만지면 느낄 수 있는 체온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른 체하고 있었다고, 우리는 비겁함의 대가로 서로를 깊이 헤아리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타인의 지옥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얻었던 거라고. 

 

 

 

...서른 살이 넘으면서 나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될 수 있는 언어들 중 운명이나 필연, 신뢰나 진실 같은 단어들을 지워 나갔다. 그런 단어들이 흘러 나간 감정은 언제나 싸늘했고 무감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방식으로 내 감정을 소비해야 했다. 미래에 대한 과장된 불안과 타인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이 그때의 내겐 있었다. 안과 집착의 공통점은 절대로 현실을 배반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아닐까. 어제보다 더 큰 불안을 끌어와 배팅해도 현실은 그보다 더 큰 절망을 준비해 놓게 마련이고, 어제의 어제보다 더 강렬한 집착을 키우며 스스로를 소모해도 현실에서 내 손에 닿는 건 한 줌의 공기 뿐이다.어쩌면 나는 우리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을 만큼 나빠질 수 있는 그런 사건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큰 절망과 더 큰 공허를 회피하기 위해 나는 미련한 곰처럼 한껏 몸을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게 미래가 없듯, 우리의 관계에도 미래가 없었으므로. ..상처 입은 자의 나약한 모습으로 미래를 겁주고 있던 그때의 내신을 지금껏 용서하지 못한다.    

 

-천사들의 도시 中

 

주인공은 서울에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32살의 女강사이다. 

그녀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수업을 지루해하고 도망가고 싶어하는데,

막상 그녀가 가장 소통을 원하는 '그'는 언제나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러던 중 그녀는 19살의 한 수강생과 연인관계가 되는데,

그는 어릴적 미국으로 입양된 탓에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

 

같은 집에서 생활하고 하염없이 거리를 걸어도

이들이 나눌 수 있는 언어는 한정되어 있기에, 교감의 폭은 너무나 빈약하고

서로의 상처나 과거에 대해서도 결코 먼저 묻는 법이 없다.

그리고 이들의 나이차와 관계탓에, 누구에게도 자신들이 연인임을 드러내지 못하며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었을 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연극 뿐이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조차도 아무 것도 약속된 것이 없는 관계. 그것이 이들이 가진 전부다.

이들은 함께였지만, 견고한 침묵의 틀을 깨지 못했고 서로의 외로움 역시 감싸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이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사람이 모두 지독하게 외로웠고 근원적인 결핍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리라.

그저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큰 위안으로 다가올 때가 있으니까...

 

오래 전 누군가와 어느 길목을 함께 내딛었을 때,

머리와 입 속에서 수없이 망설였던 무수한 단어들.

그럼에도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던 그날의 기억들이 떠올라 혀끝이 쌉싸름해졌다.

 

 

 

 

 

아파트를 나서며 최선배는 말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미련하게 알리지 않았니? 언제든지 필요하면 불러. 알았어? 여자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최 선배의 호의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이후로 최 선배를 부른 적도 없었고 최 선배가 먼저 전화를 해 준 적도 없었다. 어두워지고 좁아지는 건 시야만이 아니었다. 여자가  30년 동안 쌓아 온 모든 관계와 그 관계를 지탱해 주었던 믿음도 원래의 컬러와 깊이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나의 무대들.... 

-기념사진 中 

 

 

데뷔 5년만에 주연을 맡게 된 연극 배우. 601호 여자.

하지만 그녀는 10회 째 공연에서 '망막색소변성증' 때문에 쓰러지고

점점 시력을 잃어간다. 그리고 그녀는 직업도, 가족도, 주변의 모든 것에서 멀어져간다.

그저 자신이 공연했던 무대를 수없이 돌려보며 절규할 뿐..

 

그리고 610호 남자. 그는 성실하게 살아가던 일반인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2년을 형무소에서 보낸 뒤 뒤늦게야 출감한 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불륜남녀를 찍어 파는 것이었다.

행복한 추억을 찍기 위해 배웠던 사진기술은, 행복과 믿음을 파괴하는 도구로 돌아온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운명처럼 다가온 불행 속에서.

이 두 사람은 미래에 대한 꿈도, 삶에 대한 의지도 잃어버린 채

여자는 태연한 얼굴표정으로. 남자는 야구모자와 선글라스로 자신의 보호색을 만들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긴 채, 하루하루를 견뎌나간다.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해피엔딩인 이 작품은, 숨막히고 답답했던 마음에 조금 위안이 되었다.

 

자신의 보호색이었던 선글라스를 벗어 여자에게 끼워주는 남자의 웃음과

남자가 떠올리는 첫 기념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 여자의 모습이 어찌나 흐뭇한지...

그녀가 버리지 못했던 무대의상을 던저버리고,

이제는 남자와 함께 노란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함께 걷는 이들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짙은 먹빛이거나 흐린 먹빛이던 세상 그 어딘가가,

환하고 밝은 파스텔톤으로 아파트 6층을 비춰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