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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희랍어 시간-한강

DidISay 2014. 7. 25. 22:10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정암학당의 고전어 강좌에 대한 공지를 읽었을 때였다.

 

'뤼시스'와 '향연' 등을 번역한 전문연구가와 함께 하는 희랍어문법.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 들을 중심으로 강독을 병행한다고 했다.

 

언어에 대한 실리적인 습득.이라기 보다는 좀더 폭넓고 철학적인 강독에 가까워보이는

저 공지글을 읽으면서 문득 잊고 있었던 한강의 소설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책을 읽기 위해 아무리 이쪽 저쪽 책들을 뒤져보아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구매목록을 뒤져보니 의외로 산 흔적이 없어서 급하게 주문을 했다.

 

 

한강님의 소설을 참 좋아하지만 읽는 사이에 필요로 하는 에너지가 다른 작가들이 비해 좀 큰 편이었고

읽은 후에도 한동안 숨을 고르게 하는 시간이 꽤 오래 소요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어떤 일을 하는 중간중간 읽는 것이 아니라

쉬는 날 시간을 일정부분 떼어서 연속적으로 잡고 있었다..

 

 

 

 

이 소설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번갈아가며 서술자로 등장한다.

 

독일로 이민을 갔지만 외국어를 완벽하게 익히기엔 너무 커버린 나이였던 남자.

그는 생존을 위해 빠르게 습득해야 했던 독일어가 아닌

라틴어보다 더 낯선 언어인 희랍어에 매력을 느끼고 소질을 발휘한다.

이미 쇠락해버린 언어와 철학에...

 

그는 친가쪽의 유전병으로 인해 눈이 멀었던 아버지의 방황과 죽음을 목도했고

40이 넘어가는 현재 자신의 눈도 같은 운명으로 치닿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보살핌을 받기 보다는 낯선 이방인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국인 한국에서 생활해보기로 결심하고 희랍어 강좌에서 강의를 진행한다.

하지만 어느순간 그는 한국 역시 그에게 완벽히 편안한 장소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여자.

 

여자는  학창시절 실어증을 오랜 시간동안 앓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낯선 언어였던 이탈리아어를 접한 경험을 통해 침묵의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그 뒤로 시와 문학을 다루고 가르치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여전히 세계에 완전히 흡수되거나 맞서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실어증이 오자, 그녀는 자신의 언어를 되찾기 위해

또다른 낯선 언어인 희랍어강좌를 듣게 된다.

 

 

 말하자면, 플라톤이 구사한 희랍어는 마치 막 떨어지려 하는 단단한 열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대 이후 고대 희랍어는 급격하게 저물어갑니다. 언어와 함께 희랍 국가들 역시 쇠망을 맞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언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석양 앞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고백하자면 말이야.내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책을 내게 되면, 그게 꼭 점자로 제작되었으면 좋겠어.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끝까지 한 줄 한 줄 더듬어서 그 책을 읽어주면 좋겠어. 그건 정말....뭐랄까. 정말 그 사람과 접촉하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고개를 흔들면서 나는 너에게 물었지. 하지만 말이야. 만일 소멸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야....그건 깨끗하고 선하고 숭고한 소멸 아닐까? 그러니까, 소멸하는 진눈깨비의 이데아는 깨끗하게, 아름답게, 완전하게,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눈깨비 아닐까?

너는 고개를 저었지. 이것 봐. 죽음과 소멸은 처음부터 이데아와 방향이 다른 거야. 녹아서 진창이 되는 진눈깨비는 처음부터 이데아를 가질 수 없는 거야.

 

 

그 새벽에 문득 너는 나에게 물었지. 언제나 그렇듯 두려움 없이. 내가 받을지 모를 상처를 대범하게 감수하면서, 언젠가 눈이 멀 것이라는 사실이, 평소의 내 생각과 감정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느냐고.

(중략)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네가 말한 그런 이유로 나는 플라톤의 전도된 세계에 이끌렸던 걸까. 그보다 먼저, 한칼에 감각적 실재를 베어내버리는 불교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보이는 이 세계를 반드시 잃을 것이기 때문에

 

그 새벽에, 왜 나는 너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지 못했을까. 왜 너처럼 용기를 내서, 대범하게 상처를 감수하며 되물을 수 없었을까? 나의 조건이 그렇다면, 너의 조건은, 바로 너의 조건은 너의 생각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느냐고.

 

 

언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생존수단이자 교류의 수단이다.

남자는 남성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이라는 눈을 잃고 있고

여자는 문학가이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말로 내놓거나 글을 읽고 언어로 생각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한국어가 아니라

희랍어나 이탈리아어와 같은 낯선 언어에서만 편안함을 느낀다.

심지어 남자는 한국에 가면 자신이 이방인의 자리에서 벗어나겠다고 안도를 했지만

조국에서도 낯선 타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저 유전 때문에 별다른 계기도 없이 서서히 눈이 멀어가는 남자처럼

그녀도 뚜렷한 계기가 없는데 갑자기 실어증이 발병하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상태를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로 견디고 숨긴다.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들어도 서로 간에 아무런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두 사람에게 어떤 '관계'라는 것이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 속 두 사람은 지독하게 고립된 상태며 외로워보이며

아주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항상 외로운 사람들. 타자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나오는 한강의 소설이지만

이 소설은 유독 정적이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작은 희망이나마 그들에게 비추며 끝이 난 것이다.

미세하고 희미한 교류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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