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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투성이 연인-정미경

DidISay 2014. 1. 11. 00:43

6개의 단편소설을 묶은 정미경의 단편집.

 

제목부터 너덜너덜한 살덩어리 피비린내가 진동하듯이,

읽은 뒤에 긍정적이거나 희망찬 기분을 전달해주는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삶의 균열과 외면하고 싶을 거북한 풍경을 하나하나 까발려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각자 다른 계기로 이상징후를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이 사실은 '거짓'이었음을 느낀다.

 

동화와는 달리, 삶에서 우리가 매순간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삶을 뒤집겠다는 큰 용기를 내지 않는 이상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용기를 내지 못한 채,

누더기가 된 인생일지언정 껴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평범한 우리들처럼 속물적이고, 겁이 많은 그런 사람들이다.

 

 

 

 

읽는 내내 주인공이나 혹은 그 주변사람들이 처한 상황들이 너무 잔혹하게 느껴졌고,

이는 수식이 많은 화려체인데도 아주 건조한 느낌을 주는 작가의 문체와 결합해서

책장을 덮을 즈음엔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생에는 공짜로 주어지는 해피엔딩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아주 잔인하게 보여주는데,

주인공들의 선택은 이 부정적인 현실을 수정하거나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인정하거나 피투성이가 된 상항을  수용하고 체념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정말 그 여자 사진은 없어요."

"이 선생, 정답은 출제자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원하는 걸 해줘요."

나는 컬러 문신을 쳐다보았다. 짧게 깍은 머리 아래 배어난 땀방울이 백열등 불빛에 반짝였다. 두려운 것일까.

"그 여잘 불러요. 사진을 돌려주겠다고. 그 여자만 오면 모든 게 다 있잖아요. 카메라도 인화지도 현상액도 모델도. 오면 다리를 벌리게 하고 찍어요. 엎드리게 하고 등을 찍으라고요. 그때 한 걸 지금 못할 게 뭐예요. 버티면 한대 만 패면 돼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치겠네.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사진이 아니에요. 자기 힘의 확인이지. 하찮은 진실 따위가 아니라고요. 얼마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포켓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게 건넸다.

"씨발, 하기 싫은 것도 해야 되는 게 인생이잖아. 안 그래요?"

 

-나릿빛 사진의 추억 中

 

 

 

찻집 옆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나치게 번쩍이는 자판에서 12를 찾아 누른다. 빠르게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핸드백의 지퍼를 열고 핑크빛 탑을 만져보고 싶지만 꾹 참는다. 나는 정말 이 옷이 훔치고야 말 정도로 갖고 싶었던 것일까. 혹시 나는 뭘 가져야 행복할 것인지를 모를 뿐인 건 아닐까.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내가 겨우 숨 가쁘게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을 손에 쥐는 순간 점점 더 다른 빛나는 것들에 간절해지는.

 

-호텔 유로. 1203

 

 

 

 

날 위해서가 아니야. 당신은 내 속에서, 언제까지나. 마지막 보여주었던 그 모습처럼. 나의 피투성이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지나고 보니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고 어떤 일도 견뎌내는 게 인간이더라. 뭘 못 견디겠어. 오늘 밤 돌아가 당신 파일을 열어 하나하나 딜리트 키를 누르고 가려움도 딜리트 키를 눌러버리고, 그렇게 견뎌볼까 봐. 차갑긴 하겠지만 마지막 보았던 당신의 얼굴을 껴안고 말이야. 당신은 언제까지 나를 물어 뜯으며, 나의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피투성이의 연인. 잔혹한 연인. 당신이 특별히 가혹한 사람이란 생각은 안해. 모든 연인은 더 사랑하는 자에게 잔혹한 존재이니까.

 

사랑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투명한 어떤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지 않을래. 피의 냄새와 잔혹함, 배신과 후회가 없다면 그건 사이보그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 당신, 전등사 갔던 날 기억나? 사랑도 그런거라는 생각이 들어. 전등사를 보지 못한 그날을 전등사 갔던 날.로 이름지었듯 뭔가가 빠져 있는 그대로 그냥 사랑이라고 불러주는 거지.

 

-나의 피투성이 연인 中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불안하게 흔들리는 심전도 모니터를 지켜보며, 가망 없이 꺼져가는 불에 풀무질을 하듯 점점 많은 분량의 아드레날린을 링거 선에 퍼부어대던 그날 밤, 카텐데를 뽑아버린 순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삶은 스스로 완벽하다는 것을, 어떤 흐트러진 무늬일지라도 한 사람의 생이 그려낸것은 저리게 아름답다는 것을, 살아 있다는 것은 제 스스로 빛을 내는 경이로움이라는 것을.

 

-성스러운 봄

 

 

 

만약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자신의 앞에 놓은 어떤 사건이 나머지 생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안다면 그 사람은 그 일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갈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럴까. 누구도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지구의 자전축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대개 자신의 운명에 결정적인 일일수록 그것에 대해 전혀 무력하다.

 

..뜨거운 여름 햇살과 과일의 마지막 단맛을 넘치도록 채워주는 가을 바람조차도 윤의 창백한 양 볼을 붉게 물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지독한 차가움이 이 여자의 가슴속에 덩어리로 존재해 왔어. 이 여자는 보험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멸을 지켜보는 것에 중독돼 버린 것 같아.

 

-비소 여인

 

 

 

채 열리지 않은 몸속으로 들어온 페니스는 날 우울하게 했다.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차가운 몸이 낡은 목선처럼 무용하게 흔들리는 동안 난 우리 사이에 일상의 언어와 욕정의 언어 외에 다른 공통의 언어가 결핍되어 있음을 깨달았다...나는 떼쓰는 아이 달래듯 볼에 입술을 갖다댔다. 미즈근하고 축축했다. 요리하지 않은 날고기처럼 그 뺨은 내 입술에, 혀에, 아무런 행복감을 주지 못했다. 나는 에스키모가 아니야. 그의 살이 내 혀끝에 떨림을 주지 못하는 건 다만 그래서야.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무슨 뜻이에요?"

"대부분의 우린, 별이 아니라, 스스로는 빛나지 못하는 차갑고 검은 덩어리예요. 존재란 스스로는 빛날 수 없는 것.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월도 되고,  때론 그름도 되고, 그런 거 같아요."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