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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빙빙 돌아가던.

DidISay 2012. 1. 22. 02:49


어렷을 적 나의 기억은 이제는 흐릿한 하나의 단상으로 남아있다.

특히 5살이전의 기억들은..더더욱 그렇다.

 

조금씩 생각나는 것들은...

좋아하지도 않는 가지를 할머니가 가꾸신 화단에서

그저 재미로 똑똑 따다가 혼났던 기억...

(지금은 잘먹는다 ^^)

 

외가에 놀러갈 때마다 할머니가 쥐어주시던 펜과 종이로

열심히 공주며 동물이며 별들을 그렸던 손가락들..

한동안 힘겹게 배우던 젓가락질 연습...

 

혀짧은 소리로 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귀가 발개져서 

총각이었던 삼촌들과 싸우며 놀리며 그렇게 지냈던 날들..

분에 못이겨 울던 날 번쩍 들고 나간 삼촌에게 듣던

무섭고 이상스럽던 동화들...반짝 거리던 가로등의 불빛들..

 

유일하게 살았던 아파트가 아닌 주택가에서

뜰쪽에 있던 강아지가 무서워서

옥상에 올라갈때면 계단으로 후다닥 올라갔던 발자국들..

 

그때는 조금은 젊으셨을 할아버지와 함께

약수터에 물을 뜨러 가서는 하얀 민들레 꽃씨를 흩날리며 놀다가

할아버지께서 힘들게 들고오신 물통을 집앞에서 우겨서

낑낑거리고 들고와서는 힘들었다고 혼자 생색을 내던 목소리..

 

자긴 나중에 토끼와 결혼할거라며

온 집안을 통통통 튀어다녔다는 계집아이..

 

거실에 있던 어느 여름 장마날

날 참 예뻐해주시던 이웃집 할머니께서

(지금도 연락을 하면 참 반가워해주신다..

친할머니, 할아버지 이상으로...

몇년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교복차림으로 달려가

펑펑 울어서 눈이 잔뜩 부었었다....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진심으로 바란다...)

저게 무지개야..라며 가르키시던

어린아이의 눈에 처음으로 비쳤던 아름다웠던 무지개의 빛들..

 

가장 가슴에 애잔하게 남아있는 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걷기 시작한 날

기분이 좋아 그 무뚝뚝한 전라도 사내가 춤을 추듯이 집에 와

어머니께 불쑥 내미셨다던 노란색 꼬까신이다..

샛노란 개나리 같은 빛깔이었다던 신발..

아버지가 보자마자 나의 것으로 점찍으셨다던 꼬까신...

그걸 신은 나를 어깨에 올린다음 콧노래를 흥얼거리시며

동네의 가게며 놀이터를 그렇게 저녁내내 돌아다니셨단다...

결혼 3년만에 어머니께서 보약까지 지어드시면서 힘들게 낳으신

첫딸이 나였기 때문에 아마  더 귀애하는 마음이 드셨던 것 같다..

 

이 모든 기억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남아있다..

 

어렷을 적 가장 좋아하던

놀이터 한가운데 있던 빙빙 돌아가던 놀이기구...

그곳에 앉아서 돌아가는 바깥을 보면

난 가만히 있고 세상이 빙빙 돌아가는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친구들이

"지금은 부산입니다..혹은 지금은 미국입니다'라며

앳된 목소리로 알려주며 멈추고 웃곤했는데...

그럼 왠지 나도 '나홀로 집'에 나오는 케빈이 되어

정말 그 이질적인 장소에 온듯한 설레임을 느끼곤 했다..

 

요즘의 난 놀이기구를 타지도 않았는데

키도 훌쩍 커버렸는데

나만 빼고 세상이 빙빙 돌아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

 

빙빙빙....그렇게..그렇게..

 

(photo by  Alan Blau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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