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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살구의 계절

DidISay 2012. 1. 22. 02:14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 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가고 있었다
  나는 호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 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 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을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 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봄날은 간다, 안도현

 

 

 

언제부터인가 마트에 가면 살구를 팔고 있어서 종종 사오곤 한다.

잘 익어 말랑한 살구를 손에 쥐고 살짝 힘을 주면

가운데 씨를 남기고 깔끔하게 반으로 나누어진다.

그냥 먹어도 좋고, 남은 것은 살구타르트처럼 베이킹에 활용한다.

장아찌를 하거나, 껍질을 벗겨 뭉근하고 달달하게 조려도 별미 ^^

 

투박한 질그릇에 더 어울리는 소박한 생김새.

화려하고 매끈한 모양새는 아니지만

말랑하게 익은 것을 입에 넣으면 새콤달콤

상큼하고 보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져나간다. :)

 

살구꽃은 과실과는 다르게,복숭아 꽃에 견줄만큼 매우 화려하다.

옛날 과거는 음력 2월에 실시되어 합격자 발표를 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살구꽃이 만발하는 계절이다.

때문에 살구꽃은 급제화 혹은 행화라고 불리었다.

(고등학교 때 배우는 고전 시가에 종종 등장하는 단어)

 

중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하였는지,

과거급제자들은 살구꽃 아래서 배를 타고 즐기는 향연을 즐겼고,

이 자리에는 천자가 직접 참석하였다고 한다.

또 이 자리에 과거급제자들을 노리는 뚜쟁이;;들이나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도시가 텅 빌 지경이었다고 :)

 

또한, 공자가 고향마을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 역시

살구나무를 뜻하는 행자를 붙여서 행단이라고 부른단다.

 

난 이제 과거와 같은 시험을 보진  않지만,

아직도 삶의 순간순간이 고난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비록 화사한 살구꽃은 구하지 못하지만,

오늘 하루도 무사히 치뤄낸 나에 대한 상으로 살구를 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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