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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방-전경린

DidISay 2012. 1. 23. 04:10

"내 그림은, 잠 속을 휘감는 욕망의 넝쿨이고 동시에 넝쿨을 자르고 길을 내는 칼날이었어.내가 나에게 도달했을 때, 난 꿈에서 께어났지."

 

,,,,(중략)

 

"내 그림 때문에 너도, 아빠도 힘들었다는 거 알아.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림 같은게 있다고 생각해. 네 아빠에게도, 스무 살 시절에 한 친구가 그런 말을 했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네 아빤 즉각적으로 화를 냈어. 5.18도, 군사정권도, 국가보안법도,다국적 기업 노동자의 현실도. 이 살벌한 현실도 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고? 나도 아빠와 한판이었어. 인간인 이상. 피할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는게 있어.그래서 싸우는거지. 난 모두에게 저마다의 잠과 저마다의 싸움이 있다고 생각해. 그 잠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을 즐기면, 영영 꿈에서 깨어날 수 없어."

 

"꿈에서 깨면 뭐가 달라져?"

 

"진짜 자기 집에 도착한 사람처럼 삶에 대한 모든 부정들이 걷혀. 인간다운 의식주, 생계를 위해 하는 일, 타인과의 교제, 자기역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방바닥을 닦고 유리창을 닦는 일, 밥을 끓이는 일, 세속적 조건 속에서 살기 위한 온갖 노력들의 경건함을 알게 돼, 그게 포인트야."

 

"단지 세속적인 인간으로 살기 위해 백년의 잠을 자고 깬다고?"

 

"그냥 세속성과 달라. 말 그대로. 자신의 꿈이 선택한 삶 속에서 깨어 있는 세속성을 말하는 거야."

 

 


 

"엄만 아저씨를 사랑한다는걸 어떻게 알아?"

 

..(중략)

 

"이 사람이라면 내게 상처를 입 혀도 괜찮아, 이 사람이라면, 내게 잘못을 해도 좋아....그런 마음이 생겼을 때, 내가 아저씨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어."

 

나는 조금 놀랐다. 타인에게 그런 마음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일까...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면 상처가 많이 생긴단다.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주어도 마음이 아프고 헤어질 때 한번 더 돌아보지 않고 총총 가벼러도 상처를 받지.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상처가 되고 언젠가는 우리가 죽을 거라는 사실도 상처가 돼. 인간인 모든 게 선물인 동시에 상처가 된단다. 우리가 인간이어서 하는 잘못들과 불가항력을 승낙하기로 한거야."

 

...(중략)

 

"우리가 사랑이라는 개념의 자를 가지고 들이대는 순간 사랑은 없단다. 어디에도 없어. 지금이라면 난 사랑에 억압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고 꿈꾸지도 않고 기만당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하는 게   무엇인지 규정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네 아빠와 헤어지지 않고 세상의 높은 곳과 낮은 곳을 흘러갔을 거야. 사랑이든 아니든, 사랑에 도달하지 못하든 혹은 사랑을 지나가 버렸든. 사랑이라는 개념 따윈 버리고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믿을 거야. 네 아빠와 난 그것에 실패했어."

 

그날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뒤론 몸에서 가시들이 빠져나가듯 아빠에 대한 미움이 조금 스러졌다. 내 미움의 근원은 아빠를 아빠라는 개념의 감옥에 가두고 그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내가 아빠를 개념의 감옥에 가두는 폭력을 자행했다니 놀라웠다. 아빠는 적어도 나를 그런 감옥에 가두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빠에게 역할을 교구하는 대신, 이 사람이라면, 내게 상처를 입혀도 괜찮아. 이 사람이라면, 내게 좀 잘못해도 좋아. 아빠니까.라고 말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