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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답하다 -김혜남 본문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서로에게 내뱉는 말.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니?"
말 안해도 다 아는 사이, 눈빛만 봐도 상대의 마음이 어떤지 지금 뭘 원하는지 아는 사이, 이렇게 가까운 사이에 대한 동경은 갓난아기 적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의 기억으로부터 유래한다. 당시 엄마는 내 눈빛만 봐도 내가 배가 고픈지, 졸린지, 아니면 기저귀가 젖었는지 다 알았다. 이 떄 엄마와의 관계에서 느꼈던 하나가 된 듯한 일치감은 훗날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의 원형이 된다. 굳이 내가 말을 안 해도 엄마가 다 알았듯, 사랑하는 사람 또한 다 알아주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초기에는 서로 텔레파시가 통하는 듯한 경험을 실제로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열정적인 사랑은 감각의 문을 모두 열어 놓아 직관력을 최고조로 높임으로써 연인 사이에 교감이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시에 똑같은 말이 흥얼거리도 하며, 같은 음식을 먹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러나 열정적인 사랑의 시기가 지나면 고조되었던 감각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 후로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서로의 마음이나 상태를 알려면 끊임없는 소통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결코 슬픈 것만은 아니다. 생각해 보라, 상대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면 정말 좋기만 할까?마음에서 생겨나는 갖가지 위험한 충동으로부터 사랑을 지키는 것도 우리의 몫인데,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 그게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니 사랑하는 연인들이여, 상대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눈으로 말하지 말고, 입을 열어 구체적으로 요구할 일이다, 그리고 만일 연인이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니?"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라.
"응, 제발 말로 좀 해 줘."
읽은 책은 그간 꽤 되는데, 글로 몇 마디 남기기가 바쁘다는 핑계로 참 어렵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는 한창 인기를 끌 무렵에는 읽지 않고 있다가, 좀 지난 후에 기프트 패키지로 묶여서 나온 것을 보고 구입했다.
보통 20대를 성인의 기점으로 본다면, 30대는 성인이라고 말할 때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나이대여야 맞다. 성인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외형이나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월이 쌓여서 만들어 낸 성숙된 사고라든가 독립인 인간으로서의 완성도 등이 모두 포함된 것이고.
그런데 20대 중반을 지나가고 있는 내 생각에는, 과연 몇 년이 더 흐른다고 해서 성숙하고 완전한 인간에 발돋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공자는 30세를 이립, 즉 가정과 사회에 모든 기반을 닦는 나이라고 풀이했다. 그런데 요즘은 취업이나 결혼 모두 늦어지는 추세라 저것도 어려운 것 같다.
이 책을 봤을 때 독특했던 점은 30대를 저런 완성된 성인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맞긴 하지만 정신은 그렇지 못한 애매한 위치의 무언가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 30대를 겨냥한 책은, 대부분 연애나 재테크 혹은 회사생활과 관련된 처세술과 관련된 책이 많다. 이렇게 있으면 안 되! 조금 더 열심히 달려..이렇게 채찍질 하는 느낌을 주는.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기본적으로 아주 따뜻한 시선으로 30대를 바라 보고 있다. 그래서 읽다 보면 상처 받고 억울했던 무언가가 스르륵 하고 풀리거나 위로 받는 느낌이 든다. 아마 그래서 인기를 끌었겠지만...힘든 일이 있을 때 집어 들어서 읽고 싶은 담백한 책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과보호 속에서 살아온 세대,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됐던 세대, 그래서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거나 책임을 져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냉혹한 현실에 내던져진 것이다. 이제 그들은 부모처럼 자신을 온전히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연인을 꿈꾼다. "날 사랑한다면 그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냐?"라고 당당히 말하면서....
그러나 연인은 부모가 아니다. 그저 나와 같은 것을 바라는, 나와 비슷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연인에게 부모의 역할을 강요하지 마라. 그리고 "사랑한다면서 이것도 못해 줘?"라고 묻기 전에 한번 생각해 보라. 과연 나는 그에게 필요한 것을 해 주고 있는지를, 사랑이란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욕구를 조율해 나가는 것이므로.
.. 현대 사회는 이미지의 시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기 보다는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이는 것에 더 집착한다. 카메라 앞에 선 배우처럼 항상 웃음을 띠고 행복을 연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내면적으로 공허해지고, 그 텅 빈 느낌을 메우기 위해 더 강박적으로 행복에 집착하게 된다.
행복은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런던 타임스'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에 대한 정의를 독자로부터 모집하여 순위를 매겼더니 다음과 같이 나타났따. 1위는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아이, 2위는 아기를 목욕시키고 난 어머니, 3위는 세밀한 공예품을 만든 뒤 휘파람을 부는 목공, 4위는 어려운 수술을 성공리에 막 생명을 구한 의사였다. 이 결과를 보면 우리가 정말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낸 순간, 혹은 내가 타인에게 중요한 사람임을 느낄 때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실험 결과에서도 봤듯이 생각만큼 나를 주시하지 않는다. 그저 나 혼자 조명을 켜 놓고, 나 혼자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나만이 스타이고, 나만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들 인생의 주인공이고, 그들의 인생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살고 있따는 안정감과 자신감,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결국 내가 나 자신을 향해 환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들의 시선에 목숨 거느라 너무 많은 부분을 외양에만 투자하게 되면 내적 성숙을 위ㅣ해 투자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든다. 인생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내가 나의 진정한 팬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타인의 시선에 목숨 걸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
...창피함은 내 모습이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결함투성이로서 부적합하고 실패한 모습으로 비쳐질 때 느끼는 감정이다. 보잘것없는 나 자신이 드러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고, 속해 있는 집단으로부터 쫓겨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이런 창피함은 특히 의존적인 사람에게 많이 나타나는 감정이다. 의존적인 사람은 나와 남을 함께 섞여 있는 한덩어리의 상태로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 지향적'이며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요즘 '난 네가 창피해'라는 말이 유행이란다. 그 말 속에는 창피하지 않을 사람을 데리고 다니고 싶다는 욕망이 숨어 있다. 그 사람이 좋아서 같이 있고 싶고, 같이 다니고 싶어야 한다.허약한 나 자신을 채워 줄 보완책으로 다른 사람을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엇이 그리 창피한가? 당신에게 '난 네가 창피해'라는 말이 있다면 조심하라. 그는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볼 생각이 애초에 없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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