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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요시모토 바나나

DidISay 2012. 1. 23. 04:20

  가게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과로라는 진단을 받고 링거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전화를 걸 곳이 없다는 것에 무척 놀랐다.

 

  친척에게 전화하지니 너무 갑작스럽고, 내가 유일하게 걸고 싶은 번호는 지금은 없는 옛날 집 거실에 있는 그 전화뿐이었다.

 

  그 묘한 서글픔에, 내 방 전화를 보면서 '여기서 거기로 전화를 걸 수 있다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했더니 이내 울고 싶어졌다.

 

  나는 그때, 도라에몽과 타임머신과 늘 함께 있어 주는 로봇......

그런 얘기들을 지어낸 사람들의 깊은 고독을 상상했다. 이제는 영원히 걸 수 없는 전화, 두번 다시 들을 수 없는 그리운 목소리. 그 외로움을 해결해 줄 도구와 영원히 죽지 않고 함께 있어 주는 친구들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보편적인 슬픔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휴가도 약도 아니었다. 나고 자란 해변의 낡은 집 현관 안쪽, 좁다란 거실에 늘 쓰레기처럼 놓여 있던 전화기뿐이었다. 해지고 먼지 냄새 나는 소파와 잡지, 정체 모를 박스에 금방에라도 묻혀 버릴 것 같던 그 전화기로, 나는 어떻게든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 전화기가 울리는 광경을 상상하자 아주 감미롭고 푸근한 느낌이 들었고,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만약 엄마가 그 전화를 받았다면 나는 또 퉁명스럽게 말했을리라

    "일하다 쓰러졌어, 과로래."

  그리고 엄마는 이렇게 답하리라,

   "그럼 일단 내려와. 얘기 들어 줄 테니까."

  조금은 화난 목소리로.

 

  여느 떄 같은 흐물흐물한 옷을 입고, 큰 키 떄문에 수화기를 덮을 듯 몸을 구부리고, 조금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리라.

 

  그런 상상을 했더니, 지금의 시간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저 달콤하고 정겨웠다.

 

  많지는 않아도 진짜 친구가 몇 명 있었다.내 고집과 어눌한 감정 표현까지 모두 헤아리고 갖가지 친절한 말을 해 주는 친구들이.

 

  하지만 결국 친구로는 부족하다. 친구들은 말과 행동과 자세로 위로해주지만, 그런 떄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때로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족이 있어야 한다. 서로의 몸 냄새와 일상의 리듬을 알고 있고, 피부로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무심한......그런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몸을 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