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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외등-박범신

DidISay 2012. 1. 23. 04:26

 개인적으로 소설보다 티비문학관을 통해 접한 영상이 몇배는 더 좋았지만

소설을 읽다가 눈에 띄는 구절이 있어서 덧붙여 본다.

 

 

 

비원 쪽의 동네 어귀에 제과점이 하나 있었다.

  한옥을 가게로 개조해 만든 제과점이었다. 노상규는 매일 오후 그 곳에서 혜주 언니를 기다렸다. 혜주 언니가 하교하는 길목이었는데, 언니는 한사코 제과점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그곳을 지나치곤 했다. 가슴이 타는 듯한 그리움을 갖고서 노상규는 제과점 너머, 차갑게 지나가는 혜주 언니를 매일 보았을 것이다.

 

...

 

  진실이 있으면 절제력도 생겨. 영우 오빠가 말했다.

  노상규는 늘 앉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약속된 시간보다  한 시간 쯤 전부터 그 자리에 나와 앉아 온통 유리로 된 진열장과 창을 통해 밖을 뚫어져라 내다보았다.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대개 일몰  전후였다. 노상규가 편지로 지정해준 약속 시간보다 10여분 늦을 떄도 있었고 30여 분 이상 늦을 떄도 있었다. 노상규가 앉은 자리에서 보면 버스들이 지나는 큰길의 일부가 진열장에 쌓아놓은 빵들 때문에 그 아래쪽만 내다보였다. 큰길에서부터 제과점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리하여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하반신밖에 보이지 않았다. 보다 멀리 상반신까지 사람들을 내다볼 수 있는 다른 자리를 두고 노상규는 왜 하필 하반신이나 뵈는 그 구석자리에 한사코 앉았었을까. 그것이야 말로 혜주에 대한 노상규의 그리움이 진실이었으며 순결했었다는 한 증거였다. 너무 가슴이 타는 듯해서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혜주의 얼굴을 차마 그는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러나 하반신만 보이던 것이 대퇴부를 지나 허리까지 보이게 되고, 또 허리를 지나 가슴까지 보이게 될 때, 노상규는 멀리, 종아리와 발만 보고도 단번에 혜주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애다.

  그는 바늘에 찔린 듯, 생각했을 것이다.

  그애가 내게로, 내게로 온다.....

  마른침을 삼키고, 물잔을 움켜쥐고, 손을 떨고...그것에 맞추어 혜주의 흰 운동화와 종아리가 보이고, 책가방과 대퇴부가 보이고, 허리가 보이고, 가슴께가 보이면 마침내 드러나는 얼굴, 흰 칼라에 받쳐진 긴 목과 정결한 단발과 옥양목 같은 볼과 그린 듯한 아미의 그늘, 혜주는 제과점을 향해 일별하는 법 없이, 빠르거나 느리지도 않게 똑바로 앞만 보며 지나쳐갔다.

 

...

 

그녀가 유성과 같이 스러지고 나면 노상규는 깨뜨릴 듯이 움켜잡았던 물잔을 비로소 놓고, 소리 없이 한숨을 쉬고, 그리고 품안에서 다시 메모지를 꺼내 편지를 썼다. 수식어 따위가 전혀 없는 편지였다. 노상규에겐 아마 혜주 언니를 만나기 전까진 인생의 수식어 따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그의 가슴속엔 온갖 피 어린 수식어가 난무하고 있었다. 너무나 쓰고 싶은 말이 많아서 부나비 같이 떼지어 나는 낱말 중 어느 것을 붙잡아야 할 지 도저히 그는 판별할 수가 없었다.

  내일 또.....

  내일 또,라고 그는 썼다. 또 기다리겠다....까지는 쓰지 않았다. 기다린 다는 말은 그 무렵의 그에겐 너무 횡포한 말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갑자기 오한을 느꼈다. 나는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떨고 가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좋은 세상이라는 말이 내 귓가에 굴껍질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내겐 아직도, 여전히 험한 세상이지만 원장에겐, 그리고 서산댁에겐 지금이 참으로 좋은 세상이었다. 그들은 우리 민족 모두가 유랑의 삶을 살던 시대에서부터 그들의 인생을 출발시키고 았었으므로. 

 

 

  그것은 쓸쓸한 외등이 아니라. 분노의 외등이 아니라, 사랑의 외등이었다. 나는 꿈 속에서 목련나무에 걸린 등불들이, 세상 끝까지, 산과 강과 도시를 넘어 환하게, 만개한 목련꽃처럼, 제 가슴의 외등을 일제히 켜는 것을 오래오래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