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달콤한 나의 도시-정이현 본문
가벼운 소설들 특히 키치나 칙릿풍의 소설은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
이 책은 사실 전혀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드라마를 너무 재밌게 봐서 원작을 읽을 생각에 구매했었다.
이 드라마는 올드미스다이어리와 더불어 의외로 괜찮았던
그리고 30이 되었을 때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 중 하나이다.
여자들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대사들이 매력적.
-자, 여기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둘은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각의 가족, 친구, 동료와 함께 전혀 별개의 추억을 쌓으면서 살아왔다.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걸어온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어느 날 처음 만난다. 호텔 커피숍에서, 정장을 떨쳐입고, 서로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암호명처럼 숙지한 채 말이다. 그들은 매우 정중하고 약간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수인사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불과 얼마 뒤, 그들이 영원한 법적, 경제적, 성적, 정서적 공동체가 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그들의 가족, 친구, 동료에게 전해진다.
믿어지는가?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일이었다. 짐칸 가득 돼지들을 싣고 가는 트럭과 광화문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그러나 부모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시집 안(못) 간' 과년한 딸년이 '나가 살겠다'는 것을 전쟁 포고로 받아들였고 쉽사리 수긍하려 들지 않았다. 그에 맞서 싸워야 했던 지난한 투쟁의 과정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엄마의 입장은 남들이 우리더러 뭐라고 하겠니"라는 탄식으로 요약이 되었고, 아버지는 못마땅한 일 앞에서 평생 그래왔듯 내 얼굴만 마주치면 쯧쯧 크게 혀를 차고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리곤 했다 ...
...생각해보면 그때 부모가 나의 독립을 그토록 맹렬히 반대했던 이유는, 지금처럼 얼굴 한번 보여 달라고 자식에게 치사한 애원을 하게 되는 상황을 예견했기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서른한 살, 우리는 아직도 '엄마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일뿐더러, 그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도감을 느낀다.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 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크린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극장 관객이 된 자의 관성적 운명이었다. 극장은 익명의 낯선 이들이 어깨를 붙이고 앉아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는 곳, 그리고 암흑 속에서 타인의 빛을 훔쳐보는 곳이었다.
-나를 왜 사랑하느냐는 물음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면 태오는 나의 사랑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의미인가. 발을 헛디뎌 막막한 우주와 연결된 맨홀 속에 빠진 느낌이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태오를 왜 사랑하느냐고. 아니, 태오를 사랑하기는 하느냐고. 아니, 아니, 사랑이 무엇이냐고.
-단어는 내용을 규정한다. 때로는 선입견을 만들기도 한다. 동거, 그 단어는 음습한 그림자를 품고 있다. 그러나 동거에 대해 음탕하고 축축한 어떤 것을 연상하는 사람은, 동거를 해본 적 없는 사람이다. 동거는 생활이다. 판타지가 거세된 적나라한 생활.
-왜 아니겠는가. 지겹다. 지겨워서 까무러칠 것만 같다. 새로 산 하이힐을 절뚝이며 첫 직장에 출근한 이래, 한 달도 쉬어본 적이 없었다. 일요일 밤에는 과음을 삼갔고, 월요일 아침에는 지구의 자전이 멈추기를 바랐으며, 월요일 오후에는 아침에 바라던 게 무엇이었는지도 까먹을 정도로 바빴다. 아침 아홉 시와 밤 아홉 시 사이에는 대변도 마렵지 않았다. 몸의 사이클조차 컨베이어 벨트의 나사처럼 팽팽히 조여져 살아왔다.
-나에 대한 이 남자의 마음은 어떤 빛깔일까? '남들처럼!'을 인생의 캐치프레이즈로 높이 치켜들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혹시 그는 오은수라는 여자가 보유한 평범하기 그지 없는 외적 조건들에편안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키 보통, 몸무게 보통, 얼굴 보통, 가슴 크기 보통, 옷 입는 센스 보통, 학벌 보통, 집안 사정 보통, 어딜 내놔도 튀지 않고 인파 속에 파묻히는 여자라는 점 때문에 안심하는 건 아닐까? 피장파장이었다 나 역시도 바로 그런 이유로 이 남자에게 호감을 품고 있으니까.
나에게 바람난 모친이 있다는 사실도, 얼마 전까지 일곱 살 연하의 남자와 같이 살았다는 사실도, 회사에서 감봉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도 나는 그에게 영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 평범함 뒤에 숨겨진 남루한 비밀들에 대해 알게 된다면 이 남자의 호의가 어떻게 변할지 두려웠다.
-그동안 몇 차례의 실패한 연애들을 겪었다. 나의 옛 연인들은 제각각 다양한 결격 사유들을 치질처럼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나와 헤어진 뒤 그들 대부분이 결혼하여 멀쩡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게는 치명적이었던 그 남자의 문제를, 다른 여자들은 둥글게 감싸 안고 살아가고 있는 거다. 나의 연애들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그 남자들의 사정 때문이 아니라 나의 사정 때문임을 이제는 알겠다.
-내 곁에 다가왔다 떠난 이들이 나에게서 무엇을 읽고 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단 한가지, 그들이 기억하고 있을 그 어떤 나의 얼굴도 오롯한 오은수는 아니라는 것. 완전한 오은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리내어 책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강신주 (0) | 2012.01.25 |
---|---|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0) | 2012.01.25 |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0) | 2012.01.25 |
상처 받지 않을 권리-강신주 (0) | 2012.01.25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 (0) | 2012.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