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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새해 우리는 더 외로울 것이다-정희진

DidISay 2012. 5. 23. 02:11

 

 

  평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물건을 팔거나 연설을 하기에 적절한 인구 밀도, 승객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노약자석은 넉넉하고 한두 사람이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앉은 사람 거의 모두가 스마트폰류의 기기를 들고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종이매체, 신문도 아니고 사전만한 두꺼운 책을 든 ‘옛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조용해서 책읽기엔 좋았다.

  커피숍, 버스 정류장, 식당, 심지어 눈앞에 스크린이 펼쳐지고 있는 극장에서도 비슷한 풍경과 자주 만난다. 이제 휴대 가능한 작은 컴퓨터는 도구를 넘어 몸의 연장(延長)으로서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1964년 마셜 맥루한의 걸작,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는 “몸의 확장(extensions)”이었다. 

  나는 잠시 “저렇게 열심히 소통하는데 왜 어딜 가나 외롭다는 사람 천지일까” 생각했지만 곧 피식 웃고 말았다. 반복되는 우문이다. 이 질문은 전제 자체가 잘못된 문장이지만 언제나 강력하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지구가 하나가 된다?” 많은 사람은 미디어의 발전이 의사소통의 질과 양을 진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는 정반대다. 미디어 소통의 매개체가 발전할수록 소통은 힘들어진다.

  앞서 말한 맥루한의 유명하지만 은근히 어려운 철학, “미디어는 메시지를 저장하거나 전달, 수송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메시지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멀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 휴대폰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없는 사람과 연결될 수 없다. 매체에 따라 의사소통 여부, 내용이 결정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하는 말, “전화로 할 얘기가 따로 있고 만나서 할 이야기가 따로 있는 것”이다.

  미디어가 발전할수록 인간은 외로워진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지만 그 다음에는 도구가 인간을 만든다. 기술의 혁신은 새로운 정서와 사고를 낳는다. 내용은 형식을 따른다. ‘내용이 먼저냐, 형식이 먼저냐”라는 사고는 애초부터 의미가 없었다. 마치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것과 같다. 내용과 형식은 같은 몸이다.

  ‘단언하건대’ 매체가 다양해질수록, 기능이 업그레이드될수록 한마디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인간관계는 조각나게 되어 있다. 할리우드 영화나 CNN이 인류를 통합하고 지구인들이 “위 아 더 월드~”를 노래할 것이라는 보편성에의 의지는 미디어에 대한 대표적인 착각이다. 시청자들은 남의 사정을 알게 됨과 동시에 화면의 세계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게 된다. 내가 사는 지역은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현실은 여러 개라는 것을, 자신의 현실은 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대화(con/versation)는 개종을 의미한다. 대화하려면 개종 수준의 낯섦과 설움을 각오해야 한다. 상호 개종이 일어나지 않는 대화는 “혼자 떠드는” 것, 소통이 아니라 소음이다.

  소통할수록, 가까워질수록 외로워진다. 더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럴수록 메울 수 없는 차이를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소통(疏通)의 ‘소(疏)’가 멀어진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에게서 상처받지 않는다. 친밀한 관계,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서 더 상처받는다. 혼자 있을 때 덜 외롭다. 특히 자기충족적인 사람, 자기몰두형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오히려 충만감을 느낀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가장 외롭다.


  외로움은 인간의 조건이다. 고독은 삶의 조건이자, 더 나아가 삶의 방식이다. 인간은 철저히 관계적(사회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각기 별도의 몸을 ‘가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는 개별의 몸이다. 인류가 절대 변화시킬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극복하려고 애쓸수록 외로움은 더 맹렬해지는 것 같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삶은 어두운 밤바다에 나 혼자 타고 가는 작은 배다. 하지만 이것은 나만의 운명이 아니며 다른 배들의 불빛을 느낄 수 있다면 삶은 견딜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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