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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시계탑, 서머타임, 그리고 휴가

DidISay 2012. 1. 25. 02:24
1848년 7월 혁명 당시, 파리 시민들에 의해 제일 처음 공격을 받은 것들 중 하나는 시내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시계탑이었다고 한다. 시민들은 그 누구의 지시 없이 무작정 시계판에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혁명은 다른 모든 시간들을 정지시켜버린 채 그대로 계속 진행될 수 있었다.

사실, 당시 파리 시민들의 그러한 행동이 근대적 시간관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단절의 몸짓이라고 규정하기엔 조금 억지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그저 몇몇 사람들에 의한 우발적인 행동일 수 있고, 치기였을 수도 있다. 아무리 시계판에 총질을 해댄다 하더라도, 시간은 계속 그 뒤에서 째깍째깍 흘러갔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사건은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시계에 대해서, 시간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임에 틀림없다.

 

 

 
모든 사고와 행동을 통제

근대의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 가운데 하나인 시계는 도무지 잴 수 없고 교환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간을 수치화시켜 버리는 데 성공했고, 그에 따라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사고 또한 계량화시켜 버렸다. 인간의 노동능력은 분 단위로 측정되기 시작했고, 학습시간 또한 일정하고 세밀하게 규제되기 시작했다. 잠을 자고 식사하는 것, 심지어 섹스를 하는 것마저도 시간의 관념에 따라 통제되고 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에는 오직 두 가지 부류의 인간만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자와 또 하나는 시간을 허비하는 자가 바로 그들이다. 시간을 허비하는 자들은 사회의 골치덩어리가 되어 종내 죄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사회의 귀감이 되어버렸다. 한 인간이 생의 어떤 가치에 방점을 찍으며 살아왔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시간, 시간의 운용만이 그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권력자들의 입장에선 시간만큼 고마운 것이 또 없었다. 그들은 수시로 우리에게 ‘올해가 고비’라고 말했으며, 그래서 조금만 더 세계 최고의 노동시간을 감내하라고 강요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휴가 또한 질 좋은 노동을 위한 충전의 시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휴가를 받으면 왠지 시간에서 해방된 기분에 휩싸여 밀리는 고속도로를 마다하지 않고 해수욕장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계속 버릇처럼 휴대전화에 달린 시계나, 자동차 계기판에 달린 시계를 쳐다본다. 왜? 그 시간은 그저 노는 시간이 아니라, 오직 노동에서 유예된 시간일 뿐이니까. 그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겁나니까.

정부가 서머타임제 시행문제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논의하고 있는 중이라고 들었다. 5공화국 이후 22년 만이라고 하는데, 그 제도의 장점과 효율을 충분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왠지 모르게 한편으론 입맛이 씁쓸해진다. 정부의 가치지향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것 같아 그렇다. 시간에 기대는 것을 넘어서 시간을 조정하겠다는 의지는, 인간을 그 시간 아래에 두겠다는 방증일 수 있다.

 
 
 
시간의 경계 벗어나기

그 옛날 할머니는 장에 갈 때마다 ‘저녁께’ 마중 나오라고 말하곤 했다. ‘저녁께’란 도대체 몇 시부터 몇 시를 말하는 것일까? 그래서 어린 나는 오후 5시 무렵부터 신작로에 나가 할머니를 기다렸다. 어느 땐 2시간도 넘게 기다렸고, 또 어느 땐 기다리다 지쳐 터벅터벅 장터까지 할머니를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했던가. 그저 할머니 생각만 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이십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게 되었다.

시간의 경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려본 자들은 이미 그 답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시간이란, 바로 그 시간들인지도 모르겠다.
 
 
-2009/08/08 한국일보,시계탑, 서머타임, 그리고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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