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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고래-천명관

DidISay 2012. 6. 3. 22:00

 


천명관은 '고래'로 처음 접하게 된 작가인데,
요 몇년간 주로 인문사회서적 위주로 읽었던 탓에, 04년도에 나온 소설을 이제야;;
읽는 내내 정말 입심이 대단하다는 감탄이 저절로 터져나온다.

이 작품은 만연체에 변사를 연상시키게 하는 내러티브를 취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서 옛날 이야기를 직접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마치 백년동안의 고독이나 한국구비문학대계를 뒤적일 때와 비슷한 느낌.

같은 이야기도 그것을 전달하는 구술자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달라질텐데,
이 작품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고구마를 까먹으며 듣는 아련함 보다는
입심 걸한 옆집 할아버지를 통해 듣는 거침없음과 장대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전근대-근대-탈근대를 각각 상징하는
노파-금복-춘희로 이어지는 3대의 여성사를 다루고 있다. 
이 구조가 딱딱 떨어진다고 보기엔 약간 미심쩍은 점이 있긴 하지만,
어느정도는 시대를 반영하려고 노력한 점을 엿볼 수 있다.

(추측해보건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군은 박정희, 기상음악은 새마을 운동,
화재로 모두 불타버리는 금복의 극장은 서울시민회관,
장군이 감탄한 북측의 대극장은 평양대극장 
춘희의 벽돌을 통해 지어지는 대극장은 세종문화회관..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있진 않은데,
현실에 대한 반영은 어디까지나 우회적인 참조일 뿐이다.
굵직한 이야기의 맥락들은 모두 신화적인 인물들에 의해 채워지며
어느 민담집에서 볼법한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때문에 섬세한 감정묘사나 짜임새 있는 플롯이 주를 이루기 보다는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가 품고 있는 생동감이 가슴을 벅차게 하고
국밥집 노파의 복수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지만
사실 복수의 과정 그 자체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활기가 느껴지는 인물은 '금복'이다.
그녀는 잔혹함과 인간미 양극단을 오가는, 아주 매혹적인 캐릭터이다.
그녀는 산골 오지에서 출생했지만 타고난 수완 덕분에,
노파의 국밥집과 쌍둥이자매의 서커스를 대체할
다방과 극장이라는 근대적인 공간을 성공적으로 형성한다.

또한 젊었을 때는 자신의 매력으로 뭇 남성들을 홀렸으나,
성공의 끝무렵에는 자신의 여성성을 버리고 남근을 가지게 된다.
금복이 여성성을 버린 뒤에 스스로 파멸해가는 과정은 꽤 흥미로운데,
남성중심의 시스템에서 성공하기 위해 여성성을 억누르는 것을 목격하는건
우리 주위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힘과 경쟁으로 대표되는 시스템만으로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창조할 수 없다.
모성의 부드러움과 섬세함도 필요한게지.

그에 더해 금복이 버린 인물.
춘희가 이루어낸 세계가 새로운 탈근대라는 것도 재미있다.

 


이 작품의 또다른 매력은 어딘지 부족한 인물들에 대한 긍정이다.
품위와 위엄을 갖춘 신적인 존재가 아닌, 
근대사회에서 철저한 아웃사이더의 자리에 위치할 인물들..
그래서 더 이상 누구도 다루지 않는 인물들
이야기의 한가운데서 당당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들은 마이너리티로 밀려나 있는 여성이며,
변사에 의해 따뜻하게 그려지는 인물들도 결핍의 존재들이다.
절단된 신체나 비대한 잉여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
혹은 눈이 멀거나 말을 못하거나, 남근을 가지게 되는 여성.
현대에서는 더이상 선호되지 않는 어떤 거대함을 지닌 인물들.
김승옥의 '역사'에 등장하는 서씨를 생각나게 하는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인물들이다.

게다가 소설에서 정상적이거나 아름다운 인물들은 
대부분  잔혹하고 엽기적인 행각을 벌여 
순진무구하고 인간미 넘치는 결핍의 존재들과 큰 대비를 이룬다.

그에 더해 '고래'에서 한 시대를 마무리 짓는 붉은 벽돌을 완성하는 존재는
눈이 멀고 늙어 보잘 것 없어진 초로의 남자이며
춘희라는 이름이 부색하게 말하지 못하는 박약아에
미와는 거리가 먼 비대한 몸을 가진 여자이다.
이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혹은 부족한 서로를 보듬으며 저 기이한 세상을 헤쳐나간다.



이 작품은 현실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별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굳이 어떤 틀에 끼워맞추는 것이 그리 큰 의미가 있는 소설이 아닐뿐더러
인터뷰를 보면 작가도 그것을 의도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타고난 이야기꾼이 한바탕 걸죽하게 늘어놓는
이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세계에 몸을 폭 담구고
몽롱하게 취해보는 것은 어떨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