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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을 위한 외국어사전-샤오루 궈

DidISay 2012. 6. 7. 23:39

 

 

  ...추억은 참으로 불확실해진다. 
     추억은 당신에 대한 초상을 유지한다.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 내가 본 그림들처럼, 흐린 세부 묘사와 선으로 스케치된 추상적인 초상. 나는 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만, 당신에 대한 나의 추억은 계속 변하여, 나는 그림을 고쳐야 한다.

 

  ...어쩌면 나는 늘 당신이 나이 들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매력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당신이 더 약해지도록. 그러면 우리가 동등할 수 있을 테니까.


 
..."당신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해? 왜 열심히 당신 조각품을 팔려고 애쓰지 않아?" 내가 묻는다. "왜 당신은 늘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 당신은 집을 갖고 있어.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나는 계속한다. "돈이 큰 문제라면, 우린 그냥 당신의 서양 돈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중국으로 이사 갈 수도 있어."
  "잘 들어. 왜 당신은 한 번이라도 그냥 입 다물고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 못할까?" 당신이 말한다.
  나는 너무 없이 구는 나 자신이 싫다. 내가 사랑을 원하는 방식은 충치를 딱딱한 칫솔로 닦으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결국 피를 봐야 멈춘다. 내가 더 열심히 할수록, 피는 더 많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사랑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다고, 결국 이에서 더는 피가 흐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여전히 사랑이 모든 것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에는 "긴 밤에는 꿈이 많다"는 말이 있다. 긴 밤이었지만, 나는 내가 꿈을 지속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나는 양쪽이 모둔 어두운 산과 계곡인 좁은 길을 걷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걷고, 또 걸으며, 나는 그 불빛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 나는 사랑의 끝, 그 슬픈 끝을 향해 걷는 나 자신을 보고 있다.
  나는 전에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내가 당신을 사랑했어야 하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떠나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잃고 있다. 내가 나 자신을 볼 수 없음은 고통스럽다. 이젠 내가 그 말을, 최근에 당신이 계속해서 나에게 했던 그 말을 해야 할 때다. "그래, 나도 당신과 동감이야. 우린 함께할 수 없어."

 

 

- 이제 겨우 영국에 도착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20대 중국여자
  그리고 15살 연상의, 자유로운 영혼의 영국남자.

  얼핏 봐도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연애담. 정확히는 동거담.
  사랑과 인생을 배워나간다는 카피에서 느껴지는 핑크빛 설렘과는 다르게
  이 책은 그다지 핑크빛이지도 상큼발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문화적 환경이나 연륜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견뎌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느낄 수 있는 소설.

  실제로 예전 작가가 썼던 일기를 참조하여 쓴 것이라.
  뒤로 갈수록 늘어나는 어휘들을 관찰할 수 있다던데
  번역문이라 그런지, 드라마틱한 차이는 별로 느낄 수는 없었다.
  어눌한 문장으로 인한 불편함도 별로 없었고.

  정작 내가 짜증났던건 그녀의 어설프고 엉망인 문장이 아니라
  봉건적 연애관과 대책없는 성격.그리고 너무나 답답한 사고방식이었다.
  
  주인공 Z는 대체로 모든 행동이 남자에게 너무나 의존적이고 
  사생활은 연인이라는 명목으로 전혀 존중해주질 않는다.
  (정확하게는 지나치게 충동적이며, 빌붙는다고 느껴서 거부감이; -_-;)

  보통 보던 책을 중간에 내려놓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이 책은 위에 이유 덕분에 한동안 방치해놨었다.

  그리고 아무리 외국어라도 그렇지 어떻게 나름대로 교육 받은 여자일텐데,
  아나키즘이나 불가지론 같은 기초적인 개념들을 모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덕분의 그녀의 연인인 오히려 50대 영국남자에게 더 공감이 가서,
  내 사고의 패턴이 얼마나 서구화되어 있는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던;

  그래서 이들이 헤어졌을 때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는데,
  그 과정 속에서 여주인공도 자신만의 틀에서 벗어나
  어느정도는 자아찾기를 한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다. 뭐 어찌보면 서구화일테지만.

  마지막 장에서, '넌 항상 미래 없이, 현재만을 산다'고 엄마에게 타박받던 장면은
  두 사람이 헤어졌지만 모르는 사이에 서로의 모습을
  얼마나 많이 닮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의미심장.
  저건 사실 여주인공이 연인에게 매번 섭섭해했던 이유였으니까.


  그래. 사랑은 시나브로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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