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사이드웨이 (Sideways, 2004) 본문
이 작품은 마일스와 친구 폴의 와인을 테마로 한 일주일 간의 여행으로 시작되지만
이를 기반으로 한 로드무비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제목 그대로 샛길로 슬슬 빠지더니, 어느덧 마일스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삶이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행을 통해 뭔가를 배우거나 크게 내적성장을 거치지 않고, 말 그대로 그저 여행을 할 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행은 뒷전이고, 이 두 인물은 다른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다.
마일스를 설명하자면 마흔이 넘은 이혼남에,
영어교사일을 지겨워 하며 작가를 꿈꾸지만 아직까지 등단도 못한 상태.
결국 작품 말미에 가면 모든 출판사에서 너무 작품이 난해하다며 출판을 거부하는 바람에,
에이전시에서도 그를 포기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부인의 잔소리가 지겨워 바람을 피다 들켜 이혼했으나 언젠가는 부인과 재결합하지 않을까를 고대 중.
그러나 전부인은 성공적인 재혼을 알게되면서 이마저 좌절된다.
그러면 여자라도 잘 꼬시냐. 그것도 아닌게 순도 100%의 와인덕후에다가 -_-;
친구 잭처럼 능글맞거나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지도 못했고 능력이 많은 것도 아닌..
적당히 배나오고 머리까진 그냥 흔하디 흔한 중년남일 뿐.
여행에 동행한 친구 폴은 여자입장에서는 그냥 천하의 나쁜 놈 -_-;;
진짜 무슨 현대판 변강쇠도 아니고, 시간장소인물을 불문하고 치마만 둘렀으면 꼬셔댐;;
한물간 전직 배우로 운좋게 부잣집 딸을 꼬셔 결혼식을 코 앞에 두고 있다.
이미 영화 보다는 광고배우로 더 알려진 그 역시 마일스처럼 삶이 맘 같지 않다.
그는 약혼녀 없이는 못산다고 훌쩍훌쩍 눈물을 보이면서도, 바람 좀 작작 피라는 마일스의 구박에
'넌 와인과 문학은 다 이해하면서, 왜 내 성욕은 이해하지 못하냐'는 요상한 논리를 펼친다 (...)
결혼할거라는 걸 숨기고 미래 운운하면서 여자들을 꼬시다가
분노한 여자에게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지는 불상사도 일어나고...
유부녀를 꼬셨다가 새벽에 알몸으로 5키로를 걸어오는 촌극도 벌어진다 ;;
설명을 보면 알수 있듯이, 와인에서 연상되는 고상함이나 우아함은 온데간데 없고
찌질하기 그지 없는 두 볼품 없는 인물들이 이어나가는 이 영화는
그러나 의외로 꽤 유쾌하고 볼만하다.
삶의 권태로움이나 실패로 인한 절망감, 기대가 어긋나면서 생기는 많은 내적갈등들을
과장되지 않고 딱 누군가의 삶을 지켜본 것 그만큼만 전달해 준다.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남자들을 보는 느낌.
이 영화에서 가장 좀 씁쓸했던 장면은,
아내와의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몇년동안이나 아껴뒀던 고급 와인을
전부인의 임신소식을 듣고 난 뒤에
싸구려 패스트푸드점에서 종이콜라잔으로 들이키는 것.
테이블에 차마 올려놓지도 못하고.
그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천천히 빛과 향과 맛을 음미하지도 않는
그저 분노와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마시는 술.
와인은 적당한 기후와 품종과 햇빛, 비, 키운 사람의 정성과 기술에 따라 그 맛과 향이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얼마나 잘 숙성시키고, 얼마나 그 풍미를 잘 느낄 수 있느냐에 따라
같은 포도주라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라진다.
사람 역시 태어날 때부터 완성형이 아닌, 끊임 없이 변화하고 성숙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성숙해진 포도주를 많이 마시면, 정작 사람은 점점 어린아이처럼 감정에 솔직해지고 미숙해지는 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어찌보면 사회적인 가면 뒤에 숨어 상처 입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보다,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모습이
더 건강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 속 인물들도 드라마틱한 성장을 이루진 못했지만,
나름대로의 희망을 찾고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이며 끝을 맺는다.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약혼녀와 결혼한 폴..
소설에 대한 칭찬에 용기를 얻어 마야와 새 관계를 시작해보려는 마일스.
이들처럼 내 안의 포도주도 서서히. 하지만 농밀하게 점점 익어가
언젠가는 고혹적인 맛과 향을 간직하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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