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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2012) 본문
원작소설 '은교'를 처음 읽었을 때 그리 큰 감흥이 없었기 때문에 보지 않으려 했던 영화.
하지만 박범신 작가의 책들은 항상 영상화 되었을 때 더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에, 결국 호기심에 보게 되었다.
원작소설이 거슬렸던 가장 큰 이유는 은교의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어색한 어휘나 말투 때문이었는데,
영화에서는 김고은의 말투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훨씬 거북하지 않았다.
박해일의 노인말투가 어색하다고는 하지만 영화 보는걸 중단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럭저럭 괜찮았던.
개인적으로는 이번 작품 역시 영화가 소설보다 훨씬 더 좋았다. ㅠㅠ
(박범신 작가는 대중소설, 베스트셀러로 이름이 높았던 작가인데,
대중소설에 대한 평단의 혹독한 시선 때문에 꽤 상처를 많이 받으셨던 것 같다.
소설에서 강하게 드러났던 이런 모습들이 영화에서는 많이 순화되어 있다.
불필요하게 느껴졌던 이중삼중의 내레이션도 사라져서 훨씬 상상할 여지가 많았고.)
이 작품의 첫번째 주인공은 원로시인 이적요.
시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작가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들도 쓰는 족족 대중의 입맛에 쏙 들어차거나 이상문학상을 타는 등 타고난 천재작가이다.
문제는 이적요 자신은 소설을 발표하는 행위를 통해, 지금까지 지켜온 시의 순수성을 훼손할 수 없었기에
새경인 셈 치고 제자 서지우의 이름을 통해 이 작품들을 발표하게 한다.
두번째 주인공인 서지우는 이적요를 아주 오랜세월동안 보필한 시종이자 제자.
박범신 작가는 이 작품에서 공대생을 대놓고 디스하는데 ㅎ
시에서 소재로 등장하는 별의 차이점을 10년이 넘도록 깨닫지 못하고,
은교가 소중히 여기는 어머니가 선물해준 거울과 상품으로서의 거울의 차이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말그대로 그냥 우직한 종으로서의 미덕만 지닌 인물.
그리고 그냥 평범한.
하지만 내밀한 상처를 지니고 있는 17세의 여고생 은교.
은교는 이적요가 쓴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아름다운 자신을 발견하고,
다사롭고 고운 시선으로 자신을 묘사한 작가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이 작품의 도드라지는 장점은 깨끗하고 밝은 영상을 통해서,
17살이 가지고 있는 말갛게 빛나는 젊음의 아름다움을 아주 잘 담아냈다는 것이다.
투명한 햇살과 새하얀 눈, 흰색티셔츠 등으로 기억되는 은교의 등장은 참 눈부시다.
끈적하지 않게 표현된 여고생의 단화차림의 종아리나 발갛게 상기된 볼.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등을 너무나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말그대로 은교의, 은교에 의한, 은교를 위한 영화.
덕분에 이적요의 시선이 끈적이고 음탕한 노인의 것이라기 보다는,
바래져가는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생생한 젊음에 대한 동경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홍보 때는 이상하게 노출이 너무나 부각되었는데, 결코 성적인 느낌을 자극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맑고 깨끗하고 상처받은 은교가 돋보이는 장면들.
스승을 보호하려는 마음과 스승에 대한 경쟁심으로 은교를 가진 서지우.
자신의 바래져가고 늘어지는 주름살과 대비되는 은교의 맑은 피부와 찬란한 젊음을 사랑했던 이적요.
서지우와 이적요의 동정과 존경심,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묘한 관계는 결국 이들을 파국에 치닫게 한다.
그리고 서지우가 자신의 붉은 상처를 이해한다고 믿었던 은교...너무 뒤늦은 깨달음.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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