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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무대

줄리 & 줄리아 (2009)

DidISay 2012. 6. 29. 04:05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하는 몇가지 행동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요리이다.

평소에 하기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장인이 작품을 만드는 느낌으로 온갖 공을 들여 멋지게 완성하고 나면
그 뿌듯함에 어쩐지 마음의 짐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이 때의 요리는 어떤 꼼수나 기구도 사용하지 않고 정석대로 차근차근
아주 성실하고 정직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인데,
가장 큰 기쁨은 이렇게 만든 요리를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다.

때문에 난 혼자 우아하게 먹는 화려한 식탁도 사랑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소박하게 차린  밥상 역시 매우 아낀다.

아픈 연인을 위해 차려낸 죽 한사발을 누가 초라하다 할 것이며,
생일을 맞은 엄마를 위해 처음으로 만든 어설픈 미역국을 누가 욕할 수 있을까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백석인데.
그를 아끼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의 음식들을 아주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해서
정답고 다사롭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여승의 쓸쓸한 낯을 가지취라 표현할 줄 아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고,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서는 김냄새 나는 비를 느끼며
정월 보름에는 맛스러운 떡국을 통해 고향을 그리워 한다.

또한 '하루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속'에서 떠들썩하게 등장하는 국수는, 
마치 신화 속, 길고 긴 흰수염의 할아방처럼 반갑고 신령스럽게까지 느껴진다.

그가 자아내는 갖가지 평안도 음식들은 단순히 배를 채워주는 찬 몇가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피붙이들의 끈끈한 정, 돌아갈 수 없는 유년시절과 해체된 공동체에 대한 향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의미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쓸쓸한 감성을 담은 것이라도, 결국 음식은 먹기 위한 것. 살림을 위한 것이다.
때문에 그의 시는 쓸쓸하지만 정감이 듬뿍 느껴지며, 
노릇하고 꼿꼿하게 지진  달재 생선 한귀라도 암팡지게 뜯고 싶은 건강한 서정이 배어나온다.  

 

같은 이유로 난 음식을 다룬 영화나 만화책들도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는 줄리&줄리아이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유브 갓 메일'의 노라 애프런이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영화 내내 유쾌하고 행복한 기운이 듬뿍 담겨있다.

주인공들이 고민을 하고 곤란에 처해도, 
솔솔 김이 올라오는 냄비나 단정하게 여며진 앞치마 자락 등에서 따뜻한 정감이 배어나와
어쩐지 행복한 기운을 전달 받는 것 같아 참 기분이 좋았다.


이 영화는 1950년대와 2000년을 오가면서 요리 삼매경에 빠진 줄리아와 줄리, 두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드라마는, 다채로운 프랑스 요리 과정과 매력적인 여성캐릭터가 장점이다.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줄리아 차일드'는 외교관 남편과 함께 프랑스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는 낯선 외국 생활 속에서 음식을 먹을 때 가장 행복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음식의 맛을 아는 사람은 곧 이를 창조하는데까지 욕심을 내게 되는 법. 요리사가 되고 싶어한다.

결국 명문 요리학교인 '르꼬르동 블루에 입학. 
남자 요리사가 전부였던 그 속에서 고군분투 하며 전설적인 프렌치 셰프로 성공하게 된다.

사실 꽤 전형적인 성공스토리라 식상할 수 있었는데, 메릴 스트립의 풍부한 표정과 연기가 어우러져
너무나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줌마라니 >_<

그녀가 내뱉는 독특한 억양의 보나페티(Bonappetit)!는 영화를 보고 나서 따라하고 싶을 정도로,
행복의 주문처럼 느껴졌다. :)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0년대엔 줄리(에이미 아담스)가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에 등장하는 524개의 레시피에 1년간 도전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예상 외로 이 프로젝트는 네티즌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게 되는데, 실패해서 잔뜩 낙담하기도
성공해서 폴짝폴짝 뛰며 기뻐하기도 하는 모든 과정이 그대로 그려져서 참 사랑스러웠다.
일상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기 위해 역설적으로 까다로운 요리를 하는 모습은 어쩐지 공감 :)


줄리와 줄리아의 가장 큰 공통점은 요리 하는 것을 사랑한다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었을 때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
이들은 자신의 요리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킬 용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줄리아의 요리는 타인의 삶 역시 변화시켰다.

 



블로그나 게시판 글들을 보면 유독 빠지지 않는 것이 '음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식당에서 무엇을 먹었고, 집에서는 무엇을 먹었고 느낌이 어땠는지와 같은 글들.
단순히 분위기나 멋에 대한 허세가 아닌,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글들도 꽤 많다.

이렇게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이유는, 
식사과정을 여러 단계로 쪼개 코스로 만들어 텀을 두고 천천히 즐길만큼
먹는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행위를 넘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과 맞닿아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요리하는 과정 역시 그저 한순간의 배고픔 해소의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라,
눈을 즐겁게 하고 혀를 즐겁게 하려는 일종의 예술 행위에 가깝다.

음식을 나누는 것은 혼자서 굶주림을 해결하는 행위를 넘어서서,
상대방에 대한 환대, 공동체의 의식, 종교적 제의로 존재한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라면 한끼를 먹더라도 거룩한 식사인 것이다.

또한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더라도,
요리란 특정 대상을 위한 단 하나의 예술이고 그 맛은 다시 똑같이 재현될 수 없다.
음악과는 달리 음식의 맛은 복사나 녹음조차 불가능하니까.

때문에 오늘 어떤 곳에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먹었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기억은 비록 이것이 매일 일어나는 일일지라도,
아니 매일 일어나기에 그만큼 값지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이제 6월의 끝무렵. 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바다는 아니지만 한강이 맞닿은 이 공간에서, 김냄새 부옇게 올라오는 비를 기다려 본다.

 

 

위대한 식사 -이재무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 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고 냉수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나서면
태지붕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뿐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