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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무대

의식(La Ceremonie,1995)

DidISay 2012. 7. 23. 04:06

 

 

 

희곡-하녀들.hwp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은 1933년 2월 프랑스에서 발생한 파팽 자매의 살인사건과 매우 유사하다.

때문에 같은 사건의 영향을 받은 장 주네의 '하녀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감독 스스로 '최후의 마르크스주의 영화'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작품은 계급갈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파팽 자매의 살인사건은 하녀였던 크리스틴/레아 파팽 자매가 주인 모녀의 눈알을 뽑은 뒤 살해한 사건인데,
이 사건이 흥미롭고 극적인 이유는 경찰이 살인 동기를 묻자 크리스틴이

'나는 여주인들의 피부를 갖고 싶었어요. 대신 그들이 우리의 피부를 갖고요' 라고 말한 부분 때문이다.

 

문맹자의 수치심과 두려움과 탐독가의 오덕스러움을 강하게 드러냈던 원작 소설 '활자잔혹극'과는 달리,

(배경을 70년대에서 90년대로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계층 간의 갈등을 부각시켜 표현하고 있다.

 

때문에 자일스의 캐릭터는 독서 오덕후가 아닌 아주 정상적인 아들로 바뀌었고,

대신 멜린다와 잔느의 갈등이 첨가되었다.

 

 

 

 

 

정장까지 차려입고 오페라 돈 조반니를 즐기는 주인가족들과,

촌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3류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 소피와 잔느 

 

 

 

 

 

이 작품에서 주인가족의 딸 멜린다는 아주 흥미로운 인물인데,

그녀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고를 하려고 노력하며 소피에게 가장 시혜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며
그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지 말라고 충고하고,
스스로 차를 끓여먹고 함께 퀴즈를 풀려고 노력하는 등!의 배려를 보이기까지 한다.

 

또한 그녀는 언어에 매우 예민하여 모델 출신의 엄마가 '하녀'라는 발언을 하자
이를 '가정부'나 '관리인'으로 정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녀는 강남좌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아무리 그녀가 올바른 용어를 사용해도 그녀의 사소한 몸짓은
계급성과 무의식을 반영하여 소피와 잔느를 자극하게 된다.

 

좀 짜증나는 꼰대이긴 하지만 최소한 대놓고 솔직하긴 했던 아버지가

살인을 부르거나 소피의 분노를 촉발하진 않는 반면에,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소피와 잔느를 폭발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든다.

 

잔느가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멜린다는 자못 털털하게 기계에 관심이 많다고 자신감을 보이며 이를 수리해 낸다.

 

이를 바라보며 잔느는 자신은 기계가 아닌 시에 관심이 있다고 허세를 부리는데,
차를 다 고친 멜린다가 시동을 걸어보라고 하자
그녀는 감사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차 주변을 배회하며 거들먹거린다.


이 느린 움직임은 지배층인 멜린다와 한낱 우체국 직원에 불과한 자신의 역할이 전복되었다는 쾌감을
최대한 오래 끌려는 것처럼 보이고 이 순간 멜린다는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멜린다는 잔느에게 손수건을 빌려 손에 묻은 기름을 닦고
이를 차창 너머 잔느의 얼굴 언저리에 손수건을 던지는 행동으로 계급차를 명확하게 바로잡고 유유히 사라진다.

순간 잔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지만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멜린다의 행동에서 악의는 찾아볼 수 없으며, 오로지 공평하고 친절한 의도만이 남아있지만
이 순진무구한 캐릭터엔 어딘지 한구석 잔혹한 모습이 보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이렇게 친절한 우리의 멜린다는 잔느의 문맹을 알아차린 뒤
'난독증'인줄 몰랐다면서 그녀에게 치료를 해주겠다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감사의 말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낀 소피의 협박이었고,
결국 그녀는 이를 스스로 해결하거나 반박하지 못하고
자신이 파시스트라 비난했던 아버지의 말 뒤로 숨어 그녀에게 일방적인 해고통지를 내린다.

 

 

그녀가 정말 소피와의 평등한 위치를 원했을까?

아니면 가진 것 없고 낮은 자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자신의 모습을 통한,

나르시즘적인 만족과 그들의 감사를 원했던 것일까?

 

 

 

 

이 영화에서 또 흥미로운 점은, 소피가 문맹이라는 것인데
소피가 가진 수치심의 원인이며 그녀를 사회에서 배제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하녀라는 직업이나 여성이라는 젠더가 아닌 언어이다.

 

그녀의 문맹은 마치 외국인 노동자들을 환기시키는데,
이들의 언어는 '그들'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뚜렷한 표식이며,
언어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양 뿐만 아니라 사고력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소피가 글을 배워 그 권력에 속하는 것을 택하지 않고
오히려 회피하고 철저하게 외면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이 권력을 가진 가족들은 그저 내가 일 해주는 대상일 뿐,
그들을 동경하거나 그들의 물건을 탐하지 않는다.


주인과 따로 먹는 식탁에 불평하는 법도 없고,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는 소피.

 

소설에서 그녀는 음식조차 그들의 것을 즐기지 않고,
철저하게 하류층의 음식인 값싼 초콜릿과 싸구려 음식을 그리워하며
가족들이 여행을 간 뒤에도 그들의 '컬러 텔레비전'은 손대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는 일가족을 몰살한 뒤, 마지막으로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쏴버리는 행동을 통해
마지막까지 권력의 수단인 언어를 거부한다.

 

 

 

 

이에 반해 잔느는 권력을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며, 그들과 자신의 위치를 바꾸고 싶어한다.
마치 파팽자매처럼 그들의 계급을 탐하는 것이다.
그녀는 클리에브르 가의 우편물을 함부로 뜯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며,
처음 그 집을 방문했을 때도  책(언어)을 훔친다.


마치 김기영의 '하녀'(1960)에서 주인공이 가부장의 자식을 잉태함으로써
권력의 자리를 자신이 대체하고자 하는 것과 유사한데,
김기영의 하녀가 권력을 전복시키지 못하고 빼앗고 싶어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그렇듯이
하녀에서는 아들이, 의식에서는 잔느가 사망한다.

(교통사고로 그녀를 죽이는 가해자는 카톨릭 신부라, 다소 촌스러운 감이 있다)

 

 

 

 

하지만 권력과 무관한 소피는 끝까지 살아남고,
소설과는 달리 경찰에 잡히지도 않고 묵묵히 사라져버린다.


겉으로는 온순하고 권력에 복종적으로 보이지만,
한번 공격을 받아 치명타를 입게 되면 끝까지 물어 죽이는 폭발력을 지닌 소피는 꽤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그저 구호로만 외치는 정치적 올바름의 무상함을.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말의 허약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과거 대학생들이 참여했던 노동 운동들의 실패,

그 이전에는 일제시대 부르주아 작가들이 썼던 계급성을 벗어나지 못한 사회주의 작품들은

멜린다의 실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용어를 변경하면서 얻은 것은
과연 의식화일까 아니면 지적인 세련미와 자기 만족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