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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밥상머리 이야기 1. 뭉근한 무가 달래주던 철없던 마음

DidISay 2012. 7. 1. 01:28

요즘 계획적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음식 하나, 그림 하나씩을 골라서 번갈아 가며 글을 쓰려고 한다.

사실 이렇게 레시피 없이 담담한 이야기가 실린 글들이 그리워 
블로그들을 찾다가 없어서 결국은 내가 하게 된 것.

계속 해야지..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일인데 이제야 겨우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새로운 문을 열어본다. :)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구글 검색을 통해 가져왔다)

 

 

어릴 적 우리집의 일요일 아침 밥상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게장과 갈치국 등 각종 생선과 해산물로 이루어진 식탁.

어머니는 평일에 거의 집에서 식사를 못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항상 일요일 아침은 바다내음 물씬 풍기는 식단을 짜셨다.

하지만 문제는 어릴 적 나는 소머리국밥 냄새만 맡아도 마치 임산부인양 헛구역질을 해대는 아이였던데다가,
미역국에 소량 뜨는 기름마저 싫다면서 샅샅이 걷어내는 까탈스러운 유치원생 에미나이였기 때문에
비린내 담뿍 나는 일요일 아침은 곤욕일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나는 항상 엄마에게 지지배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혼쭐이 나곤 했다.
아빠는 뭐 별 말이 없으셔도, 해병대 출신답게 남다른 기상(氣像)을 자랑하셨으므로 눈치를 보는건 당연지사.

그나마 점심에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외식을 했기 때문에 무사히 피해갈 수 있었고,
저녁에는 나물이나 샐러드 위주의 가벼운 식사를 했기 때문에 맛있게 먹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아침.

그래서 토요일 저녁이면 내일은 또 아침밥을 어떻게 무사히 지나게될까 고민을 할 정도로
그 아침식사는 나에게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한상 가득 차려진 식탁 앞에서, 밥과 김치만 가지고 식사를 해야하는 상황도 난감했고
눈치가 보여 억지로라도 뭐를 먹긴 해야하는데 그 비린내 나는 것들에 젓가락을 대긴 죽기보다 싫고.. 그런 상황

일요일 8시면, 항상 티비에서 틀어주던 디즈니만화를 보면서 대충 굶고 넘어가려고 해도,
언제나 생선내음이 폴폴 나는 식탁을 차려놓고 엄마는 나를 부르며 재촉했다. ㅠㅠ

지금에야 해산물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지만 이때는 왜 이리 싫었는지.
오늘 생선은 참 물이 좋다든지, 오늘 게장은 참 맛이 잘 배었다고 나를 유혹해도
당시 나에겐 그냥 비리고 식감이 딱딱한 것도 부드러운 것도 아닌 어설픈 음식일뿐
전혀 끌리질 않았다는 것이 문제.

하지만 이 지옥의 식탁에서 나를 유일하게 구해주는 음식은 바로 '무'였다.
어느날 엄마의 독촉에 못이겨 한 입 댄 고등어와 무가 의외로 참 맛있었던 것.
특히 내가 반한 것은, 생선조림 안에 들어가 있는 무의 부드러운 맛이었다.

짭짤하고 매콤한 양념에 어슥하게 듬성듬성 썰어낸 투명한 무.
어쩐지 예쁘고 곱상하진 않지만, 슴슴하고 소박한 차림새에 발목이 가는 미인이 연상되었는데
그만큼 깊이가 있고 부드러운 맛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노출하나 없는 차림새지만, 간혹 시야에 들어온 긴 치맛단의 새하얀 발이 더 자극적인 것처럼
뭉근하니 부드러운데, 커다란 무를 한입 배어물면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맵싸한 맛이 좋았던 것.

그 뒤로는 생선조림이나 국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무를 통해
엄마의 매서운 눈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었고, 나중엔 다른 해산물까지 함께 먹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어릴적 읽었던 러시아 민담에는 '커다란 순무'라는 동화가 나온다.

"달고 커다란 무가 되어라!"
할아버지가 정성 들여 가꾼 밭에서 무는 무럭무럭 자라나, 급기야 도깨비처럼 엄청나게 커져버린다.
할아버지 혼자 힘으로는 뽑으려야 뽑을 수 없어 할머니를 불러보지만 둘이 힘을 합쳐 뽑아도 어림도 없다.
손자가 합세하나 그래도 어림 없어서, 개와 고양이 쥐새끼까지 동원되어 영차영차 지화자 조오타 하면서 열심히 무뽑기를 한다.

지금 러시아에서도 '커다란 순무'는 '바보 이반'과 '곰 세마리'와 함께 인기 1위 자리를 다툴 정도로 사랑받는 이야기라고 한다.
아마 온식구에 더해 쥐새끼의 보잘 것 없는 힘까지 동원되어,
거대한 힘의 세력을 이겨낸다는 희망의 교훈이 이 동화엔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난 가끔 이 동화를 보면서, 이렇게 고된 노동 후에 먹는 식사는..
커다란 무조림은 얼마나 맛있을까를 엉뚱하게 상상해보곤 한다.

 


이 동화에 나오는 커다란 무는 서양식 샐러드에 종종 사용되는 래디시와는 전혀 다르다.
선명한 붉은 색에 앙큼한 모양을 갖춘 래디시는 맵다기 보다는 쌉쌀한 맛이 더 강한데,
우리에게 익숙한 커다랗고 투박한 조선무는 좀더 맵싸한 맛이 난다.

래디시가 여우상의 치켜올라간 눈을 가진 여인이라면,
우리의 무는 수줍은 자태를 한. 그러나 강직한 내면을 갖춘 조선시대 미인도를 더 닮고 있다.

V.M. 코발료프가 쓴 '러시아 요리, 그 전통과 풍습'이라는 책에 의하면
무는 인류가 먹어온 농작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종류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예들의 음식이었다고 한다.
또,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폴론 신전에 제물을 올릴 때 사탕무는 은쟁반에, 무는 구리쟁반에 올렸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꽤 유서 깊은, 야채계의 명문가인 셈이다 ㅎ

로마인이 무를 품종개량 하는 데 성공하여 그 뒤 유럽 각국 사람들의 상비 식품이 되었는데,
특히 중세기의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농민들은 수확한 무의 10분의 1을 교회 세금으로 바쳤다고 한다.
신대륙에서 가져온 감자가 러시아 방방곡곡에 보급되기 전까지 무는 주식으로 활용되었다고 하니, 꽤 소중한 식재료였던 셈.

무는 어떤 기후 조건 아래서라도, 아무리 척박한 토양에서라도 잘 자라고, 수확 뒤에도 장기간 저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 음식에서도 김치, 깍두기, 무말랭이, 단무지, 조림, 국 등 매우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무는 특히 비타민 C의 함량이 높아, 겨울철 비타민 공급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소화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는  아직 밑이 덜 들어있는 무 두 밑을 뽑아 소녀에게 건내는 장면이 나온다.
소년은 소녀를 위해, 무의 대강이를 한 입 베물어 낸 다음 손톱으로 슥슥 껍질을 벗겨 우쩍 깨무는 모습을 선보인다.
순박하면서도, 꽤 터프하지 않은가 ㅎ


하지만 도시에서 온 소녀는 '맵고 지리다'면서 던져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 이 얼굴이 하얀 분홍빛 스웨터의 소녀도 맵싸하게 조려진 무조림은 참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눈치를 보며 살얼음을 걷는 심정이었던 일요일 식탁에서 철없던 나를 구해주던 유일한 음식.
생선의 비린 맛을 잠재워, 나에게 그 신선한 맛의 비밀을 열어주었던 재료.

지금도 뭉근하게 조리된 투명한 무를 베어물 때면,
그 때의 기억이 나서 어쩐지 마음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

짙은 색의 간이 잘 배인 무.
간장양념도 좋고 김치가 듬뿍 들어가 자작하게 지진 것도 좋다.
하루 잘 묵혀 깊은 맛을 내는 무 한조각을 베어문다.

그리고 도량이 크고 성정이 깨끗한 청주를 쭈욱 들이켠다.
고즈넉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