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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 이야기2. 알수록 깊어지는 그대. 본문

스쳐가는 생각

밥상머리 이야기2. 알수록 깊어지는 그대.

DidISay 2012. 7. 2. 00:21

 

 

 

난 대학 1학년 때부터 자취를 시작해서,
졸업을 하고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쭉 독립된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에야 혼자서 육첩 칠첩 반상을 냉큼 차려놓고 먹기도 하고,
이런저런 반찬들을 항상 끊이지 않게 해놓고 있지만
초기 자취 생활의 내 식탁은 한동안 꽤 좌충우돌의 격정기를 거쳐야만 했다.

지금까지 엄마가 매끼마다 반찬을 바꾸며 만들어 놓은 각양각색의 음식들만

야금야금 먹었던 평범한 여자애였던데다가. 이제 막 시작한 독립생활로 청소부터 시작해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한다는 부담감에 휘청거릴 때라
첫 반년간은 꽤 고생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이상한 벌레가 나왔다고, 엄마에게 새벽에 전화해서 울기도 했으며
처음 살아있는 꽃게를 손질하려다가 움직이는 꽃게발에 혼자 놀라서 넘어지는 등
말그대로 하루하루가 모험의 연속!이었다.

 

물론 엄마가 음식을 하실 때 옆에서 시중을 들거나 거들었던 경험으로
기본적인 찌개나 반찬을 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요리는 결코 대충해서는 깊은 맛이 우러나지 않는 법.

항상 실력에 비해 과한 완벽주의에 넘치는 의욕으로 고생을 사서 하는 나는,
이 당시에도 무언가 완성해놓으면 성에 차지 않는 맛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인터넷에 떠도는 요리비책을 샅샅이 뒤지거나, 엄마에게 도움의 전화를 청하곤 했었다.



그 당시 나에게 구원의 섬광과도 같은 음식은 바로 김이었다.
어느 수퍼에서나 팔고 가격이 싸며, 특별한 조리 없이도 충분히 맛있는 음식.
모든 자취생의 냉장고에 하나쯤은 자리하고 있을, 간단한 반찬이자 때로는 소박한 술안주.

김은 요리계의 감초처럼, 매우 다양한 요리들로 응용되었는데
계란에 넣고 지지면 고급스럽고 예쁜 계란말이가 되고,  1+1로 가져온 당면을 넣고 튀기면
맛있는 김말이가 완성되어 그럴듯한 분식상을 뿌듯하게 차려낼 수 있었다.
  
그뿐이랴 밍밍한 맛이 지겨워지면, 고추와 함께 바삭하게 튀겨 매콤달콤한 부각을 만들어도 좋았고,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내면 윤기 잘잘 흐르는 김무침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역시 가장 좋은 것은 바삭하게 건조된 파래김을 참기름 슬슬 발라 약불에 노릇하게 구워서
굵은 소금 탁탁 뿌려 하얗고 보얀 쌀밥에 싸먹는 그 맛이다.

가만가만히 씹으면 점점 우러나오는 고소하고도 깊은 맛.
서민적인 음식이지만, 우아하고 섬세한 결이 느껴지는 귀족적인 맛



사실 내 입맛은 이미 어릴 적 부터 집에서 엄마가 직접 구워주던 바삭한 김맛에 익숙해져 있었고,
20년 가까이 길들여진 입맛에 가공되어 나온 김이 만족스러울리 없었다.

하지만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무렵엔, 김을 직접 구워먹을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급한대로 슈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인스턴트김을 사서 먹곤 했다.

그런데 어릴적부터 먹어와 기억하고 있는 김맛은, 수퍼에서 파는 김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느날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스쳐가듯 하니, 훌쩍 다 큰 딸이 굶을까봐 걱정이라도 되셨는지
한바탕 그런 음식은 먹으면 안된다는 잔소리와 함께 당장 바리바리 집에 있는 김을 보내주셨는데
아 생각해 보니 우리집은 어릴적부터 완도 큰집에서 보내주시는 김으로 식사를 해왔었다.

완도에서 막 도착한 신선한 김은, 그늘에 두면 바삭바삭 짙고 깊은 흑암벽빛을 띄었지만
한장을 쓱 꺼내 빛에 비추면 아주 맑은 초록빛이 참 예뻤다.

그래서 잔뜩 기대를 품고 김을 구우려고 기름칠 하는 솔까지 사다놨는데,
이게 뭐람. 의외로 김을 굽는 행위가 너무 어려운 것이다.

후라이팬이나 오븐시트를 사용하지 않고, 엄마처럼 직화로 구우려고 시도했으나
역시 내공이 부족했는지 조금만 불이 세도 타버리고,
불이 약하면 다 바스러지거나 형태가 예쁘게 나오질 않았다.

직화로 구울 경우 단시간에 빠르면서도 바삭하게 구워내야
김의 전체적인 사이즈가 균일하게 줄어들어 모양이 보기 좋은데
그런 기술을 터득하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느날 본가에 가서 엄마 김 굽는 것만 한참을 보고 관찰하니 엄마가 이상하게 보셨던 기억이 난다.

몇 장의 김을 희생시킨 뒤, 결국 후라이팬을 사용해서 구워낸 김은
힘은 들었지만 역시 맛은 좋았다.

구운김은 참 신기한 음식이다.
김만 먹어도 맛있지만, 밥과 함께 먹으면 왜 또 그렇게 맛있는지.
물에 밥을 말아먹어도, 김반찬만 있으면 무섭지 않다.


보슬보슬한 쌀밥을 직사각형 김으로 동그렇게 감싸고 입에 넣으면
짭쪼름하면서도 까칠한 굵은 소금이 혀안에서 녹아내리고
고소한 참기름의 향이 입과 코로 동시에 밀려 들어와 저절로 침이 고이게 했다. 
입안에서 찌익하고 찢어져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참 맛있다.

고급김은 싸구려 가공김과는 다르게, 김의 조직 자체가 매우 촘촘하게 꽉 차있다.
그래서 김 한 톳 뭉치를 보고 있자면 흡사 완도의 깊은 바다를 들여다보고 있는듯한 착각이 든다.

이렇게 참기름이 자작한 감이 지겨울 땐 어떤 음식을 먹는게 좋을까.
내 경우엔, 얼음 동동 띄운 미역오이냉국에 기름 없이 구운 바삭한 김
그리고 깊은 맛을 내는 간장이다.

진정한 술꾼은 술의 아픔을 술로 푼다고 했는데,
내 경우엔 김의 권태를 김의 다른 모습을 통해 풀어내는 셈이다.

얇아서 빛이 투과되는, 초록색 윤기 흐르는 김을 펼친다.
김에 간장을 살짝 묻혀 밥을 말아 입에 넣어 본다.
진하고 푸릇한 맛이 혀에 와닿는다. 씹을수록 깊어지고 풍성한 향을 낸다.

김을 한자로 海衣 즉 바다의 옷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이름에 걸맞게 입속에 옷자락이 화르륵 펼쳐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밥의 기운에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더 힘차게 바다의 기를 내뿜는다.

흰밥 말고도 어르신들처럼 라면이나 멸치국물, 떡국 등에 잘게 부숴넣어도
순식간에 파릇한 기운을 그 음식에 불어넣을 수 있다.

김 하나에 쩔쩔매던 내가 어느덧 여러 반찬을 내키는대로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래김 한 통, 참기름과 진간장만으로 만드는 반찬은 여전히 소중한 단짝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