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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밥상머리 이야기3. 1층부터 달려가는 날.

DidISay 2012. 7. 3. 00:15

 


몇년 전 군입대를 앞둔 친구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난 평소에 친한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대신,
가볍게 식사를 잘 챙기라거나 무엇을 먹었는지 질문을 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도 아마 버릇처럼 며칠 뒤면 훈련소로 향할 그 친구에게, 
입대 전날 어떤 음식을 먹을건지 가볍게 물어봤었다.

군대에 다시 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몇몇 친구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사형을 앞둔 죄수에게 뭘 먹고 싶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_-;; 그런 느낌이기도 했는데
과연 이 사람은 절박한 상황에서 어떤 맛을 가장 원할까 궁금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평소에 집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라,
다른 머스마들이 으레 그렇듯이, 오랜만에 엄마가 해주는 진수성찬에 고기 반찬을 잔뜩 먹겠거니 하고
어느정도 미리 대답을 예상한 상태에서 심심하게 물어봤다가 의외의 메뉴가 등장해 반짝!하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 친구가 대답한 음식은 바로 카레라이스였다.
그것도 인도 음식점이나 일본 카레 전문점에서 먹는 카레가 아닌,
바몬드나 오뚜기 등의 상표와 함께 떠오르는 평범한 엄마표 카레.

군대를 가는 많은 남자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그냥 버릇처럼 입대전날 무엇을 먹을건지 물어봤었지만
카레를 대답으로 돌려받은 적은 없었기에 신선한 느낌과 동시에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카레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행복한 가정의 향이 있다면, 과연 어떤 냄새를 떠올릴 수 있을까?
나에게 그 향은 바로 카레분말의 톡 쏘는 향신료 내음이다.

유치원 무렵에 이사간 우리집은 4층짜리 아파트였는데,
이곳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모두 보냈으니
이 아파트 단지와 놀이터는 내 유년기 기억의 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흙모래를 튀겨가며 술래잡기를 하거나
1층에 살던 단짝친구와 함께 토끼풀 더미 속에서 행운의 네잎클로바를 찾다보면
어느덧 어둑어둑하게 땅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배가 고픈 저녁 시간.
퇴근한 아저씨들이 하나둘씩 들어가시고, 아이들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 당시엔 자동센서가 없었기 때문에 4층까지 올라가는 계단은 꽤 어두웠다.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지긴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어두워진 층계에 들어가야 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유독 겁이 많은 나는
그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은 아파트 입구에 들어가질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아파트 입구 앞에서 4층에 있는 엄마를 목놓아 부르곤 했다.
엄마아~ 엄마아~ 엄마아~ 하고 부르면
이때만 해도 꽤 앳된 모습의 엄마가 베란다를 통해 쏙 얼굴을 내민다.

 

 

너 왜 안 들어오고 거기 있어. 배 안고파?  너 얼굴 좀 봐. 흙투성이잖아. 얼른 올라와서 씻고 밥 먹어.
엄마. 나 무서워서 못 내려가겠어. 데리러 와.
아이고 이 지지배야 그냥 올라와. 뭐가 무서워
무섭단 말이야. 나 그냥 아빠 퇴근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래 ㅠㅠ

이렇게 놀이터에 털썩 주저않으면 엄마는 언제나 한숨을 쉬면서 내려오시곤 했고,
올라가면서 집 가서 씻고 나면 혼날거라는 말에도 난 오종종 거리면서
엄마 손에 무서움을 잊고 히죽 웃으며 계단을 오르곤 했다.

그때는 굉장히 커보이던 엄마의 키.
여름이면 항상 등장하던 찰랑거리던 긴 꽃무늬 원피스,
내 손을 가득 쥐고 성큼성큼 걸어가던 용감해보이던 엄마의 손.

엄마가 올라가면서 하나씩 켜주는 계단의 스위치는,
따뜻해 보이는 등불을 하나둘씩 비밀스럽게 열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내가 엄마를 부르지 않고 1층부터 4층까지 쭉 올라가는 날이 있었으니
그 날은 엄마가 저녁 메뉴로 카레를 하는 날이었다.

엄마는 오늘은 어쩐 일로 혼자 계단을 올라왔냐고 대견해 하셨지만,
사실 그건 내가 갑자기 용감해져서가 아니라 카레 냄새 때문이었다.


난 어릴 적에 국물이 밥에 튀어서 색을 변질-_-시키거나 
밥과 무언가를 섞어 먹는걸 굉장히.엄청나게. 꺼렸다.
때문에 카레나 짜장밥이 나와도 언제나 국물과 밥을 따로따로 먹었고,
누군가가 밥에 카레국물을 얹어주는건 거의 악몽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를 매번 유혹하는건 카레 냄새로,
그 묘하고 자극적인 향은 어쩐지 나를 달뜨게 만들었다.

카레냄새가 풍기는 날은 엄마가 집에서 맛난걸 해놓고 기다리는 날이었고,
조금 일찍 집에 들어서면 각종 야채를 써는 나무도마 소리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커다란 냄비의 리듬이 날 기쁘게 했다.

 
때문에 1층까지 새어나오는 카레 냄새가 풍겨오면
그 행복한 기분에 휩싸여 마치 엄마의 정령이 나를 지켜주는 듯한 용기를 얻어
한달음에 다다다다 4층까지 뜀박질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숨을 가쁘게 쉬며 엄마~ 라고 외치며 문을 열면,
부엌에 보이는 저 다정한 요리 풍경들과 가지각색의 소리. 
큼직한 야채가 들어간 소박한 카레들이 언제나 날 배신하지 않고 맞아줬었다.

요즘은 워낙 고급 카레전문점도 많고, 이런저런 카레분말들도 많이 생겼지만
여전히 나에게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상기시켜 주는 음식은,
엄마가 계속 고집하시던 바몬드 카레 약간 매운 맛.
버터를 넣고 달달 볶은 커다란 감자와 당근이 들어간 하루쯤 묵힌 카레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저 음식을 할 때면,
어디선가 그때 그 젊었던 엄마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설핏 웃으면서 나올 것만 같다.


 

가끔 퇴근 무렵, 카레 향이 나는 집 앞을 지나게 되면 나는  생각한다.
아 이 가족은 오늘 밤 참 행복하겠구나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