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파주 (Paju, 2009) 본문
이 영화는 박찬옥 감독의 다른 작품들처럼 홍보와 실제 작품간의 간극이 너무나도 크게 벌어져 있다.
형부와 처제간의 넘을 수 없는 아슬아슬한 사랑이야기처럼 포장해놨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욕망과 상처가 노출된, 생채기투성이의 날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개와 먼지, 깨짐과 상처가 뒤범벅되어 있는 이 영화는 파괴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기 보다는
파괴된 사람들의 관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고혹적인 와인 컬러가 아닌 무채색이 주를 이루는 영화다.
도발적으로 올려다보는 서우와 눈길과 멘트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 서우는 팜므파탈적이지도 않으며,
이선균 역시 처제를 노골적으로 탐하기엔 너무나 상처 깊은 영혼이다.
때문에 은밀한 사랑이야기를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크게 분노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건 폐허. 그리고 고작해야 이선균의 엉덩이 정도였을테니 (...)
이 작품의 인물들은 제각기 나름의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기형도의 시들이 떠올랐다.
이선균의 사랑은 따뜻한 가정집과는 거리가 먼, 차갑고 쓸쓸한 빈집과도 같은데,
그가 사랑하는 상대는 항상 금지된 대상이며
필연적으로 그 관계는 단단하게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폐허처럼 허물어지며 끝이 난다.
그의 첫사랑이자 강렬한 욕망의 대상이었던 선배누나는, 역시 같은 운동권 선배의 부인이었다.
자신의 선배가 감옥에 갖혀 있는 사이에 벌어지는 그들의 사랑은 당연히 불안하고 허기질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강하게 끌리고 동시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어느날 싸움 끝에 벌어진 그녀와의 정사.
그리고 그 절정의 순간에서 그녀의 아이가 화상을 입게 되며
이를 목격한 이선균은 도망치듯이 서울을 떠나 파주로 향하게 된다.
대학도 졸업하지 못하고 머물게 된 파주는 그에겐 도피처였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온 서우의 언니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이미 마음이 닫혀 굳은 벽을 쌓아버린 이선균은 그녀를 사랑하지 못하며
이전의 강한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성관계 역시 맺지 못한다.
이선균이 애정을 갖을 수 있는 대상은 밝고 적극적인 서우의 언니가 아니라,
상처 받기 쉽고 방어적인 서우였다. 폐쇄적이고 여린 그녀의 모습이 자신과 닮아있었으므로.
때문에 그는 단지 서우 곁에 머물러 지켜보기 위해, 그녀의 언니와 결혼을 했을 뿐
그저 무미건조한 일상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당연히 서우의 언니는 그리 행복해하지 못한다.
어느날 술에 잔뜩 취해 몇 달만에 관계를 맺은 뒤, 서우의 언니는 만족해 웃음을 띄지만
막상 정신을 차린 이선균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용서해달라'고 울부짖고 죄책감을 느낀다.
한편, 부모 없이 언니만을 의지해 살아온 서우는
언니를 이선균에게 뺏기고 혼자 남게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매우 초조해한다.
게다가 이선균은 자신이 그렇게 아끼는 언니를 사랑하는 것 같지도,
능력이 있어 돈을 벌어오는 것도 아니기 떄문에 그 불만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선균이 사랑하는 서우와 사랑하지 않는 아내 사이에서 괴로워했다면,
서우는 미우면서 동시에 새로 의지해야하는 형부와
자신이 지금까지 부모처럼 의지했고 사랑한 언니 사이에서 갈등한 것인데
이는 결국 언니를 죽이는 간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해 버린다.
언니와 자신의 세계에 이선균이 쳐들어와 자신을 밀어냈다고 믿은 서우는 가출을 결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니를 가스폭발로 사망하게 만든다.
이선균은 이 사실을 안 뒤에 서우를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
집을 나가버린 그녀를 다시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언니가 사망한 이유를 끝까지 알려주지 않기 위해 차라리 자신이 의심 받는 상황을 감수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서우는, 이제 언니마저 사라진 상황에서
자신 곁에 게속 남아준 이선균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언니를 뺏어갔다는 미움 때문에 이는 표현되지 못하는 애증으로 남게 된다.
이선균 역시 서우에 대한 애정을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이 둘은 계속 돌고도는 쳇바퀴처럼 미묘한 감정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우가 조금 안정을 찾고 이선균 곁에 머물다 싶었을 때 다시 등장한
이선균의 첫사랑 선배녀...그리고 운동권이었던 이선균의 구속.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서우는 또다시 자신이 혼자 남겨지고 상처받는 과정을 견딜 수 없어
감옥에 있는 이선균을 남겨둔 채 인도로 떠나버리게 된다.
이선균이 어렵게 마련한 등록금을 모두 챙겨서.
몇년 만에 다시 돌아온 서우가 마주한 파주의 배경은
물질주의적 욕망을 대표하는 재개발지역의 나이트클럽.
그리고 재개발 지구의 거주민들과 용역깡패들간의 거친 싸움.
집도 물도 나오지 않는 황폐해진 건물과
벽돌과 철근이 그대로 드러나있는 마을의 모습들이 주를 이룬다.
안개가 가득 맴도는 파주의 풍경과
화염병, 물대포, 악다구니와 '생존권' '쟁취'라는 빨간 글자들의 흔적은
여기저기 할퀴고 찢겨나간 인물들의 마음처럼 날 것 그대로 거칠게 드러난다.
이선균과 서우가 정말 '쟁취'하고 싶은 것은,
혼자 남겨질거라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 생채기 없는 마음이었을게다.
이제 그녀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고향의 흔적은 오간데 없고
간신히 남은 것은 언니가 사라진 집.
애정의 대상이자 상처의 원인이 된 이선균이 남아있는 마을과 파괴된 공동체.
그리고 생존 앞에서 각박해져 버린 마을 사람들의 짐승같은 날카로움 뿐이다.
여전히 변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을 반겨주는건 이선균 뿐.
몇년만에 재회한 서우와 이선균은 여전히 복잡미묘한 상처를 안고 있고
서로에게 어떤 마음도 표현하지 못한 채, 겉도는 관계만을 유지한다.
서우는 계속해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선균의 주위를 맴도는 동시에 언니의 죽음을 파헤치려고 방황하며,
이선균은 이제는 목적의식이나 방향성도 없이 하루하루 밥먹듯이 철거민들과 함께 투쟁을 할 뿐이다.
그의 투쟁은 상처를 잊기 위한 몸무림처럼 보이며, 삶의 한 부분을 자포자기한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날 이선균이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라는 말로
처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을 때, 서우는 다시 파주를 떠난다.
다만 이번엔 이선균을 이용하려는 철거민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조치를 취한다.
아마 결코 맺어질 수 없고, 맺어진다고 해도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인 관계이므로,
이것이 자신과 그를 위한 최선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속마음을 보여준 그에 대한 마음정리의 과정일 수도 있고.
그리고 이선균 역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무죄를 입증한다거나
서우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침묵하는 길을 택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나 상처를 서우까지 갖게하고 싶지 않았을테니..
모든 것을 자신의 죄라고 생각하고 감내하려는, 그만의 사랑법이었을게다.
파주의 두 주인공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사랑법에 의해서,
이 사랑을 끝맺고 유지하기 보다는 서로를 보호해주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도 보고 나서 마음이 이렇게 착찹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때문일까.
서로의 상처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 두 사람은,
언제나 자신들이 사랑에 빠진 그 상처 때문에 맺어지지 못하게 된다..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그들 각자의 무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그빌 (Dogville, 2003) (3) | 2012.07.26 |
---|---|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2008) (2) | 2012.07.25 |
의식(La Ceremonie,1995) (0) | 2012.07.23 |
퍼펙트 블루 (パーフェクトブルー, 1997) (0) | 2012.07.16 |
줄리 & 줄리아 (2009) (2) | 2012.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