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2008) 본문

그들 각자의 무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2008)

DidISay 2012. 7. 25. 05:24

 

 

 

 

요즘 열대야 때문에 중간에 잠을 깼다가,

에어컨을 틀어놓고 책 한권이나 영화 한편을 보고 다시 자는 날이 며칠 째 이어지고 있다.

 

덕분에 그간 보지 않고 방치 중이던 dvd나 책들을 매일 한작품씩 줄여나가고 있어서

일정 부분은 긍정적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들을 좋아하는지라,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바로 아 유태인 이야기구나 싶었다.

 

파자마라는 단어는 마땅히 폭신한 침대와 보드라운 이불, 꿈결 같은 시간을 암시해야하지만

줄무늬와 함께 결합했을 때 이 단어는 유태인 학살과 수용소라는 전혀 다른 함의를 갖게 된다.

 

 

 

존 보인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여타의 유태인을 다룬 영화와는 달리 비참한 수용소의 생활이나 이들이 잔인하게 핍박받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유태인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전쟁 상황은 은유와 암시로만 전달될 뿐,

직접적으로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은 서술자인 소년에 비친 독일 장교 가족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뭉개구름이 뜬 높은 하늘에 

날씨는 매우 찬란하게 맑으며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이

피아노 선율이 주를 이루는 배경음악과 함께 이어진다.

 

 

 

 

 

 

 

이 작품의 첫 장면은 단정하고 깨끗한 베를린 중심가의 모습과

흰 건물에 인상적으로 걸려있는 붉은 나치휘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쟁 상황이라는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독일인들의 삶은 평온한데,

비행기 흉내를 내면서 천진난만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순수와 평화 그 자체이며

사람들의 밝은 표정이나 잘 정돈된 도시의 모습에서는 어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8살인 브루노는 독일 고급장교인 아버지의 전근에 의해

베를린에서 폴란드로 이사를 가게 된다.

 

환송파티를 비추면서 보여지는 그의 집은

게토에서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들의 모습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반짝이는 새파란 눈을 가진 그의 가족들은 교양 있고 예의바르며

시종들에 의해 잘 닦여진 은식기와 인형이 가득찬 방은 화려하고 아름답다.

아이들은 전쟁놀이를 하지만 전쟁 중이라는 것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들 가족은 매일밤 주님에게 기도하는 신실함을 가지고 있고,

독수리 문양이 반짝이는 아버지의 유니폼은 자랑스러움이자 특별함이다.

 

유태인 수용소가 위치한 폴란드로 전근을 가는 상황이지만,

파티에 모인 독일인들은 전쟁에서 곧 이길 수 있다고 믿으므로

불안하기 보다는 여유와 느긋함을 보이며

케이크와 와인, 온갖 꽃과 과일로 치장된 식탁은 풍요롭기 그지없다.

 

 

 

 

 

베를린에서 폴란드로 옮겨온 영화의 중반부부터는

화사하고 단란했던 이 가족을 조금씩 바꿔놓는다.

 

 

집은 군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라 경직되고 심각한 분위기이고

저 멀리 농장에서는 자꾸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검은 연기를 주기적으로 뿜어낸다.

 

 

 

새로온 가정 교사에 의해 나치즘에 빠져들게 된 12살의 누나는

아직 모험과 공주와 기사를 좋아하는 브루노와는 달리

인형을 버리고 공격적이 되며, 유태인들을 경멸하게 된다.

 

 

 

 

친구도 없고 학교에 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브루노는 자신만의 작은 모험을 감행하는데

그것은 바로 출입이 금지되었던 '농장'에 방문하는 것.

그리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만난 슈무엘과 친구가 된다.

 

아이들에게 독일식과 유대식의 서로 낯선 이름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었고

이것은 신기할망정 서로를 동물이나 해를 끼치는 무엇으로 간주할 수 있는 이유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어서

농장인줄 알았던 건물은 유태인 포로 수용소였으며,

아이들은 번호를 달고 노는 것이 아니라 갇혀있는 것이었다.

 

그저 평범해보이는 유태인들이 온 세계의 악이며

건물의 철조망이 동물이 아닌 사람들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는 것에

브루노는 설명할 수 없는 혼란을 느낀다.

 

 

 

 

이 어리둥절한 차이는 브루노의 삶에도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가는데,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던 아름다운 엄마는 검은 연기의 정체를 알게 된 뒤로,

점점 쇠약해지고 아버지와 고성을 주고 받으며,

불행한 표정과 눈물자욱을 감추지 못하게 된다.

 

우리집에서 '감자를 깍기 위해' 의사를 포기한 이상한 할아버지 파벨은

와인을 쏟는 실수를 한 뒤에 어느날부터인가 돌아오지 않는다.

나치의 선전물에서 카페와 음악회가 이루어진다고 말했던 수용소에는

웃음과 춤은 커녕, 피 묻고 헐벗은 사람들과 감시가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유태인들은 인간이 아니라면서 가학적으로 그들을 대하며

그럴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집안의 분위기는 얼어붙어 간다.

 

웃음기 없이 경직된 어른들의 모습, 검은 연기와 철조망들은

말간 얼굴의 브루노가 바라보는 전원적인 풍경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비극성을 높여준다.

 

 

 

 

 

이 모든 일들은 유태인에게만 상처를 입힌 것이 아니라,

브루노의 가족들 모두에게 충격을 주면서 큰 상흔을 남기게 된다.

 

나치즘을 반대했던 친할머니가 폭격으로 사망했을 때,

그녀의 신념에 반하는 장례를 치뤄야 했던 것도

스위스로 망명한 아버지 때문에 전방에 차출된 코틀러 대위도

모두 이 광적인 행동의 희생자들이다.

 

 

이 시기에 나치와 신념이 다른 가족은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무언가였고

타인보다 더 먼 존재들이었으며, 내 삶에서 감춰야하는 업보였던 것이다.

 

 

 

 

 

보통의 영화들은 끊임없이 유태인들의 참혹한 모습을 비추거나

전쟁의 비참함을 보여주면서 숨막히는 긴장감과 슬픔을 유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최근의 영화들은 이런 감상주의에서 점점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근래에 본 사라의 열쇠도 그렇고 불필요한 눈물짜기식의 영상은 최대한 자제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의 급작스럽게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은,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음악이 멈춘 뒤에도 참 오랜 시간동안 먹먹함을 준다.

 

내가 탄압하는 대상에게 하는 행동이

나의 가족에게 되돌아왔을 때 그것은 정당한 행위이자 국가를 위한 정의가 아닌

인간이 할 수 없는 무자비한 학살로 인식된다.

 

 

 

 

 

 

굳은 철문을 두드리다 잠잠해지는 소리들.

그리고 수많은 수용소의 옷들만을 비칠 뿐이었지만

그 어떤 영화의 눈물범벅의 화면보다도 더 강렬했던 마지막 장면..

 

 

 

 

아우슈비츠 이후   - 최명란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

깡마른 육체의 무더기를 떠올리면서도

횟집을 서성이며
생선의 살을 파먹었고
서로를 갉아먹는 쇠와 쇠 사이의
녹 같은 연애를 했다

역사와 정치와 사랑과 관계없이

이 지상엔 사람이 없다
하늘엔 해도 없다 달도 없다
모든 신앙도 장난이다

 

 

 

 

 

 

진정한 절망은 침묵할 때라고 한다.

절망을 시나 철학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오히려 희망의 계기로 반전되기 때문이다.

 

역사나 삶의 한순간에서 아픔과 절망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이를 끊임없이 끊임없이 피를 토해내며 표현해야 한다.

냉정한 진단만이 고질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