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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빌 (Dogville, 2003) 본문
이 작품은 도그빌(2003)-만덜레이(2005)-워싱턴(2007)으로 이어지는
라스 폰 트리에의 '미국:기회의 땅' 3부작 중 첫 작품이다.
사실 워낙 유명한 영화라 대학교 초반에 봤던 작품인데
당시에 3시간에 가까운 영상에 계속 집중하고 있기엔 너무 피곤했던 상태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해 계속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꽤 긴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마주한 이 영화는 역시 훌륭하다.
이 영화는 자막과 서술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극의 구성, 마을의 상황, 각 장의 소제목을 표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흡사 희곡의 해설을 그대로 읽어주는 느낌인데
2장 9막으로 이루어진 연극을 영상에 옮겨놓은 것 같은 이 장치들은
극도로 인공적이고 통제된 공간에서 배우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로키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도그빌'이라는 마을이 이 연극의 배경으로,
훔쳐갈 것조차 없는 아주 가난한 마을답게 가구나 마을사람들의 입성은 소박하기 짝이 없다.
강당같은 곳에 분필로 구획을 나눠놓은 정도로 마무리지은 무대로 봐서는
분명히 900만달러 정도 된다는 제작비의 대부분이 배우들 개런티로 나갔을 것이다.;;
배우들 캐스팅만은 짧은 등장이 아까우리만큼 탄탄하니까.
이 영화는 열린 공간에서 시선의 자유가 보장되는 연극과는 달리
감독의 의도대로 카메라를 움직여 초점의 방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동시에 내레이션을 통해 인물들의 감정과 사건의 진행상황을 전지적 시점으로 해설해준다.
해설은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는 다소 건조한 목소리로 진행되며,
덕분에 관객들은 피해자인 그레이스보다는 가해자인 마을사람들에 더 초점을 두어 관찰하게 된다.
각 장에 딸린 소제목들은 다음에 이어질 상황을 미리 예고해주므로,
때문에 결말을 제외하고는 관객들은 다음에 이어질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
또한 연극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을 넣기 위해 영화기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트럭에 숨어있는 장면에서 천에 투영된 그레이스를 표현하는 장면은 감탄이 나온다.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에서도,
실제 연극처럼 모든 무대가 나오도록 롱샷을 사용해 배경과 사람을 멀리서 함께 잡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배우들을 클로즈업 하여 표정과 동작을 선택적으로 보여줘
군더더기 없이 관리된 무대를 통해 감독의 의도를 그대로 따라오게 한다.
이 극에서 공간을 구분하는 물리적인 것은 오로지 분필로 그어진 선 뿐
눈에 보이는 벽과 문은 존재하지 않지만,
배우들의 마임과 후반으로 갈수록 갑갑해지는 극의 분위기만으로도
역설적으로 폐쇄적인 공동체를 표현하기엔 제격이었다.
'개 같은 마을'이라는 뜻의 도그빌이라는 명명법처럼
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하나 모두 상징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감독은 이를 숨길 생각도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아름다운 도망자 그레이스가 숨어들어온 이 마을은
느릅나무길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느릅나무와
의사인데도 건강염려증에 걸려있는 톰의 아버지처럼
위선과 부조리. 그리고 허울 좋은 가면으로 가득차 있다.
주요 등장 인물들.
1. 그레이스
극의 대부분을 끌어가는 중심인물 그레이스는
이름 그대로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의와 친절을 베풀려 애쓴다.
그녀는 도시인답게 가난하고 순박한 시골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 있으며,
그들에게는 인정을 베풀고 아버지에게 들이댔던 것보다 훨씬 낮은 도덕기준을 요구한다.
그녀는 오만함은 나쁘다며 타인이 자신을 싫어하는건 자유라고 말하고,
모든 이에게 관용과 사랑을 표현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무기력해지는 그녀의 캐릭터는 아무 반항을 하지 않고,
때문에 마을사람들의 비인간성이 어디까지 갈지 조마조마한 느낌이 들게 한다.
물리적으로 그녀를 핍박하는건 도그빌의 개 같은 사람들이지만,
영화 상에서 그녀와 가장 대립적인 의견을 나누는건 그녀의 아버지이다.
마을 사람들과는 거의 대립이 없이 그저 그들이 하는대로 끌려가는 느낌이고,
일정부분 포기한다거나 어디까지 하나 두고보는 느낌.
결국엔 그녀가 그토록 벗어나려고 했던 아버지의 권력을 빌려
마을 사람들을 처단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2. 톰 에디슨
톰 에디슨은 자칭 작가로 의사 아버지의 덕택에 놀고 먹다시피하는 반백수이다.
인간의 영혼을 깨우치고, 마을 사람들에게 도덕심을 길러주겠다는 명목으로
수시로 주민회의를 소집하는 오지라퍼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 마을 사람들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가 원하는 문학은 영혼을 정화시킬 수 있는 문학, 새 삶을 제시할 수 있는 글이다.
그러나 그는 정작 글 쓰기는 거의 하지 않고, 친구 빌의 누나 리즈에게 끈적이는 눈길을 보내며,
스스로 실천하기보다는 몰아붙이는 식의 설교로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한다.
그는 마을을 '사랑한다'고 표현하면서도 막상 마을을 소개할 때는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마을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수용의 미덕'을 일깨우기 위한 실례(illustration)인, '선물'의 필요성을 느낀다.
마침 갱단을 피해 도망쳐온 그레이스는
그가 마을사람들에게 좋은 도덕적 교훈을 줄 수 있는 기회로 보였고
그는 그녀를 한치 망설임도 없이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그의 이름은 톰 소여+톰 에디슨에서 각각 따온 것인데,
이를 암시하듯이 극 중간에 두툼한 '톰 소여' 양장본판이 등장한다)
3. 척
척은 가장 완강하게 그레이스의 도움을 거절하는 남자로
도그빌에 대해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품고 있다.
도그빌을 교화시키려고 노력하는 톰과는 달리, 척은 이 마을과 일정부분 거리를 두고
풍족하지 않아 잘 드러나지 않을 뿐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 마을도 속부터 썩어 있다고 표현하는데
재밌는건 가장 먼저 썩은 행동을 하는 인물이 바로 '척'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레이스의 상황을 악용해 밀고하겠다고 협박하며
그녀를 거듭해서 강간하고 마을에서 그레이스가 학대 받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 역시 그가 그렇게 싫어하는 도그빌의 일부였고,
아무리 회의론적인 태도를 취해도 벗어날 수 없는 마을의 구성원이었던 것이다.
4. 리즈와 베라 등의 마을여자들
리즈는 처음에 그레이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녀가 그레이스를 숨겨주는 일에 찬성한 이유가
자신이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마을 남자들의 끈적한 시선이
그레이스에게 옮겨가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톰이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자 질투를 하며,
그녀가 남자들을 유혹했다고 강하게 비난한다.
척의 아내 베라는 지적인 허영심이 강하나 막상 자신의 아이들은 버릇없이 방치하며,
자신의 남편이 그레이스를 강간한 것을 안 뒤에도, 남편이 아닌 그레이스를 매춘부라고 몰아세운다.
이건 뭐 '말레나'와 거의 흡사한 상황;;
이 영화에서 변화하는 조명들은,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는데
첫번째 차갑게 빛나는 흰 조명으로의 변화는 그레이스를 경계하고 주시하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표현한다.
그레이스는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육체노동을 자처하게 되고,
처음엔 모두 거절하고 고마워하던 사람들은 점점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들은 진심에서 우러나와 선의를 베푼다기 보다는,
큰 은혜를 베푸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도취되어 우쭐해하는 나르시즘적인 모습에 취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의 등장 전후로 마을 사람들은 하나의 카르텔을 생성하게 되는데,
그레이스가 범죄자가 아닌 실종자인데도 분위기는 경직되며
그녀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법을 어기는 것이 찜찜하다는 명분으로 그녀를 노예처럼 굴린다.
협박을 통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고 혹사시키는 것은
그레이스가 지적하듯이 갱들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이 마을사람들의 행동이 재밌는 것은,
이들이 초반부에 설명되었듯이 모두 '마을을 사랑하는 선량하고 가난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장애인', '흑인', '의사', '가난한 자','여성', '어린아이', '외지인 출신'으로 이루어진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더 약한 자인 그레이스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억압 논리에 동조해 몇배로 더 교묘하게 그녀를 핍박한다.
독립기념일. 눈처럼 아름다운 꽃씨가 흩날리는 날
아이러니하게도 이날부터 그레이스의 일은 기쁜 마음으로 하는 봉사가 아닌 의무와 책임이 되며,
그녀는 온갖 차별과 마을사람들의 이기심, 성적학대를 견뎌야하는 처지가 된다.
이들은 그녀를 강간하고 혹사시키면서도 온갖 명분을 빌어
자신의 의도를 그럴듯하게 정당화하고 포장하기에 급급하다.
특히 척이 그레이스가 지나치게 아름답다며 자신에 대한 존경을 증명하라고
그녀에게 탓을 돌리며 강간하는 장면은 비극적이기 짝이 없다.
성폭력 피해자 탓하면서 핑계대는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_-;;
벽이 없어 한 공간으로 느껴지는 무대에서, 고요하고 태연한 마을과
누구하나 돕는 이 없이 무방비 상태로 강간 당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미 그 마을에서 그레이스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나 기계와 다름 없고
그녀는 협박에 대한 두려움과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 빠져 아무 저항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그레이스는 또다시 주민들의 도움으로 추격자들을 따돌렸다'
마을을 벗어나게 해주는 조건으로 물질적인 대가를 받은 벤은
죄의식 따위 없이 마치 공적인 물물교환인 것처럼 강간을 정당화하고,
그 뒤에는 다시 그녀를 마을로 돌려놓음으로, 자신이 도그빌의 일원임을 증명한다.
'김복남 살인사건'을 볼 때도 느꼈지만, 이렇게 폐쇄적이고 작은 공동체가
일단 카르텔을 형성하게 되면 정말 무서운 것 같다..
처음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한명두명 합류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불안해져서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동조하게 되니까.
톰은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거짓말 때문에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 아래, 그레이스가 개줄에 묶이는 극단적인 상황에 가서도
내 거짓말은 너를 지키기 위한 행위였다고 정당화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톰 역시 그녀의 약점을 노려 성적으로 갈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이 마을 남자들은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왜 하나같이 저 모양인지;;)
다만 체면 때문에 이를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했을 뿐.
사실 처음부터 그는 그녀를 마을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선물'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첫눈이 내려 사과의 수확과 판매가 모두 끝난 평범한 마을로 내러티브 되는 도그빌.
순백으로 덮인 마을은 하얗게 빛나 아름답다.
마치 독립기념일에 흩날리던 흰 꽃씨를 연상시킨다.
이날 그레이스는 톰의 조언을 받아 마을 사람들의 개개인에 대한 진실을 폭로하지만
그들은 자기방어에 급급해 이를 모두 부정하고, 오히려 그녀를 비난한다.
힘없이 그녀가 목사관을 나갈 때, 그레이스의 사슬은
마을 사람들의 탐욕스러운 마음을 보여주듯이 눈을 헤치고 검은 밑을 드러낸다.
톰 역시 그녀에게 자신의 정곡이 찔려지자, 상처받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밀고를 결심한다.
그가 그녀를 팔아넘기는 행위는 '감상에 빠지는 오류 없이 융통성 있는 이상'이었으며
갱단의 연락처를 버리지 않고 저장해둔 이유는 소설을 위한 창작자료의 수집이었다.
스스로 높은 이상가이자 도덕심이 높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그레이스가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자 가장 빠르게 그것도 작가로서의 양심 운운하면서
위선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입맛을 쓰게 만든다.
눈이 녹아사라진 후, 마을 사람들의 위선적인 친절과 배려는 계속되고
갱단에 밀고를 한 장본인인 톰은 여주인공을 그레이스로 하여 사랑을 다룬 소설을 완성하는
표리부동의 극치를 보여준다.
갱단이 도착한 후 굽신거리는 모습은
약자에게 저지르던 행패와는 어찌 그리 다른지.
하지만 결론은 뜻밖에도 그레이스의 대사
'아무도 여기서 못자'로 귀결되는데
(친절하게도 서술자가 친히 복선이라고 해설해주기까지 한다.
이 작품은 관객이 뭔가 추리하고 상상할만한 여지가 없이,
바짝 감독이 내뱉는 호흡을 따라가게 만든다. )
이 영화의 엑기스는 마지막 부분에 모두 담겨있다.
(아래부터는 결말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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