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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

DidISay 2012. 7. 31. 21:48

 

 

 

더위를 피하기 위해 쿨매트+에어컨+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무장하고 이 소설의 첫 장을 펼쳤을 때,

가장 눈에 띈 것은 사실 소설가 박민규씨의 외모였다.

 

치렁치렁한 긴머리와 선글라스, 국방무늬의 바지,메탈팔찌 등은 이 사람이 소설가인지 락가수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는데

작가의 초기작이라 그런지 다른 작품들에서 봤던 그의 모습보다 더 강렬한 프로필 사진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드는 생각들은, 당연히 정형화되고 얌전한 내용은 아닐거라는 느낌이었고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추상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 작품이면 곤란한데..라는 걱정이었다.

집에 있어도 벗어날 수 없는 불볕 더위 탓에, 유쾌한 작품을 보기 위해서

발랄해 보이는 제목과 표지를 지닌 이 작품을 선택했기에 이 날만큼은 심각하고 우울한 내용은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야구나 축구에 흥미가 있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모르는 영역'에 대한 '호기심' 내지는 '오기' 일 뿐,

아직까지 야구계보를  줄줄 외운다는건 무리고, 야구 규칙을 '외워야 한다거나 배워야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순수하게 즐기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므로 재미 없으면 어쩌나 싶어서 어느 정도의 걱정을 안고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대박 아니면 쪽박의 그 아슬아슬한 느낌!

 

하지만 이런 걱정은 소설의 초반부를 넘어서면서 멀리 잊혀져가기 시작했고,

꽤 재밌고 유쾌하게 즐거운 책장 넘기기를 할 수 있었다.

나에게 이 작품은 대박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중박 정도는 되었다.

 

 

 

이 소설은 82년 한국 프로야구가 탄생한 해부터 2002년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전반부는 서술자의 청소년기인 82-85년을/ 후반부는 98년 IMF를 주축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삼미슈퍼스타즈'라는 인천을 연고지로 탄생했던 삼미그룹의 프로야구단이 이 소설의 주축을 이루는 소재다. 인천에서 삶의 절반 이상을 보낸, 서술자는 82년 창단식 때의 흥분과 어린이 야구단으로서의 자부심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슈퍼스타즈'라는 이름을 반어법으로 만들어버린) 충격적이리만큼 처참한 연패와 이로 인해 느꼈던 실패와 분노의 감정이 전반부를 차지한다.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며 자라나도 시원찮을 그 시절. 그렇게 우리는 원망과 분노와 사무친 원한 속에서 자신을 자학하며 자라나고 있었다....우리는 세상을 원망하며 인생을 자포자기하는 법부터 배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져도 좋다. 멋진 야구를!"과 같은 말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 배부른 말은 5위인 롯데의 팬들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길고 암울했던 82년 전기 리그는 22연승의 불사조 박철순의 활약에 힘입어 OB베어스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우승을 확정짓던 마지막 게임에서, 헹가래를 치는 OB선수들과 덩달아 꽥꽥 거리던 또래의 리틀 미련곰탱이들을 바라보며-나는 지금 이 순간, 북한이 쳐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땅굴은 모두 완성되었겠지?

 

실제로 “최하위 탈피가 당면 목표”였던 삼미 프로야구팀은, 국가대표출신 하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고, 1982년 전기 10승 30패 승률 0.250, 후기 5승 35패 승률 0.125로 (이 기록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최저승률이다) 1년 내내, 아니 1983년을 제외하고 1985년 구단이 청보에 매각될 때까지 최하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83년 드라마틱하게 2위를 차지할 때까지 온갖 언론의 조롱 대상이자, '깍두기'신세였던 이 팀은 그러나 84년 마치 '부메랑' 처럼 꼴찌의 자리로 돌아옴과 동시에 85년에는 18연패의 전설적인 기록을 남김으로  인천팬들에게 OB에 대한 증오심과 곰,사자,호랑이, 용에 대한 분노를 활활 타오르게 해버렸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열성적인 야구팬들이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열정과 '광기'라고 불려도 무리가 없을만한 에너지가 각 장마다 활활 타오르는 느낌인데, 이런 감정을 표현해내는 박민규식 비유와 표현법은 위트가 넘쳐 큭큭하는 웃음을 연이어 내뱉게 만든다.

 

 

 

 

평범한 야구를 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확실히 평범한 야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삼미는 그토록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걸까...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결국 문제는 평범의 기준에 관한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평범인가? 거기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1980년대의 세상은 3위 MBC 청룡과 4위 해태 타이거즈를 하나로 꽉 묶어주는 새로운 용어 하나를 만들어낸다. 중산층....나는 보았다. 꽤 노력도 하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수치와 치욕을 겪으며 서민층에 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무진장, 혹은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면서도 그저 그런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중산층에 파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그리고 도무지 그 안부를 알 길 없는 -이 프로의 세계에서 방출되거나 철거되어-저 수십 km 아래의 현무암층이나 석회암층에 파묻혀 있을 수많은 얼굴들을, 나는 보았다.

 

 

 

사실 '아내가 결혼했다'처럼, 축구나 야구 등을 사용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거나 재미를 더하는 작품들은 꽤 많다.

그런데 이 작품의 특징은, 그저 처절한 패배자였던 슈퍼스타즈를 '패배에서 승자가 된' 촌스러운 영웅담으로 만들거나

그저 재미를 주는 소스로만 사용하지 않고 자본주의와 '프로'에 대한 사색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야구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교묘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지점이 깊은 통찰이 엿보이면서도 위트가 넘쳐 매우 흥미로웠다.  박민규에 의하면 '삼미 슈퍼스타즈'는 온갖 맹수들과 어우러져 있던 다른 프로야구팀과는 달리, '우승'이 아닌 '야구를 통한 자기수양'을 위해 달린 팀이다. 마스코트 수퍼맨과 치어리더 원더우먼 복장을 통해 '프로'의 행세를 하지 않고, '미국의 프랜차이즈'가 된 자신의 모습과 독재정권의 코미디를 있는 그대로 온몸으로 보여준 팀이었던 것이다.  또한 삼미는 프로의 세계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팀이자 '자기만의 야구를 완성'한 고수들의 모임이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패배를 통해 유년기의 그는 자신이 염세적이 된 이유가 '삼미슈퍼스타즈'의 소속이었기 때문이라고 결론 짓고,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인간이 아닌 '곰이나 소를 위한 교육'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우직하게 외우고 또 외워 이를 달성한다.

 

 

 

'소속'의 슬픔이란 그런 것이다.

이른바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듣는 집단에서도 이 '소속'의 콤플렉스 앞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사실 그래서, 인간은 절대 평등할 수 없다. 

 

 

점점 성장하면서 그는 '혁명에 있어서도 일류대라는 소속이 있어야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혁명의 주체가 되리라 생각했던 서민층과 중산층이, 실은 그 지층이 더욱 다져지길 원했다'는 선거의 결과를 깨달으며

동시에 일류대라는 최고의 소속 안에서도 다시 지역과 고등학교에 따라 수없이 많은 지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삼미슈퍼스타즈 팬이라는 패자의 기억을 안고 있었던 나는 일류대에 진학했지만 

'한번도 겸손해질 기회를 가지지 못한' 그들과 괴리감을 느끼며 

자신과 비슷한 '촌티''사투리'라는 하위지층의 표식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며 아웃사이더처럼 방황한다.

 

 

 

하지만 결국 졸업 후 그가 걷게 된 것은 국내 최대의 대기업과 흔히 말하는 성공을 위한 커리어의 행보였고,

'가정을 버려야 직장에서 살아남는다'를 충실히 실천하며 언제나 회사에는 일찍 가고 가정에는 지각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IMF를 통해 그에게 닥친 것은, '평생직장'이 아닌 이혼과 실업이었다.

남은 것은 얼마간의 퇴직금 뿐.

 

그리고 그는 친구를 통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못할수록 좋은' 야구를 시작하게 된다.

직장에서 잘리면 죽을 것만 같았던 삶은,  마치 삼천포에 빠지듯 모든 것이 엉망이었지만 기분만은 좋은 묘한 상황이 이어진다.

 

사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순위에 신경쓰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거나 즐겁게 일하기'는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위험한 적일지도 모른다.

 

 

 

 

그럼, 전부가 속았던 거야. '어린이에겐 꿈을! 젊은이에겐 낭만을!'이란 구호는 사실 '어린이에겐 경쟁을! 젊은이에겐 더 많은 일을!'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면 돼. 우리도 마찬가지였지. 참으로 운 좋게 삼미 슈퍼스타즈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우리의 삶은 구원받지 못했을 거야. 삼미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도 같은 존재지. 그리고 그 프로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모든 아마추어들을 대표해 그 모진 핍박과 박해를 받았던 거야. 이제 세상을 박해하는 것은 총과 칼이 아니야. 바로 프로지! 그런 의미에서 만약 지금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예수가 재림한다면 그것은 분명 삼미 슈퍼스타즈와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

 

그때는 이미 프로의 세계가 현실에서 구축되어 수많은 삶이 영문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프로야구'를 하게 된 것처럼, '인생'을 살던 모든 국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 '프로인생'을 살아야 했던 시기였어....'치지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를 견지한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너도 알다시피 모든 선수들의 가슴 속엔 저마다 빛나는 자존심이란 것이 있게 마련이니까. 또 놈들은 누구나 칠 수 있을 것 같은 공을 끊임없이 던져주곤 해. 또 일부러 바로 코 앞에 공을 던져 선수들을 유혹하기도 하지. 물론 그건 노동력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야. 어이, 자네 새 차를 뽑았다며? 여어, 진급을 축하하네! 에서 사소하게는 자네 요즘 비싼 담배로 바꿨군, 이나 미스 정 많이 예뻐졌네, 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유혹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 프로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놈들이 바라는 이 세계의 여건은 완벽해지는 것이니까.

 

...

 

'착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행해진 게 아니었어. 실제의 착취는 당당한 모습으로, 프라이드를 키워주며, 작은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며, 요란한 박수 소리 속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형이상학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거야.  

 

 

...

 

올 여름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넘쳐흐르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대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어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퉁퉁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탕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을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이 소설이 가볍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 것은, 실제 작가가 무한경쟁의 직장에서 뛰쳐나와 무작정 글을 쓰기 시작한 이력을 가지고 있고 그 와중에 잉태한 첫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허구의 인물이기도, 작가의 대변인이기도 한 것이다.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길고 알기 힘들게 풀어나가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온 작업이다. 이토록 묵직한 주제를, 오히려 탄력 있고 경쾌하게 풀어나가는 강력한 힘이 소설가 박민규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