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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루시 랜들

DidISay 2012. 7. 22. 15:52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루시 렌들의 '활자잔혹극'은 꽤 흥미로운 작품이다.

 

가정부에 의한 일가족의 몰살극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느낌은커녕

작가가 내내 고수하는 인물과의 거리두기 방식 때문에 건조한 느낌이 지배적이다.

 

지배-피지배계층의 갈등을 강조한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 '의식'과는 달리,

이 작품은 문맹으로 인한 피폐함과

생활과 분리된 탐독이 초래하는 부작용에 초점을 더 맞추고 있다.

 

 

 

 

 

교외의 대저택에서 호화롭고 교양있게 살아가는 커버데일 일가에

새로운 가정부 유니스가 들어오게 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커버데일 일가는 부와 교양을 모두 가진 가족인데,

재클린과 조지 부부는 모두 잘 교육받은 지식인층이고

그들의 자녀들과 며느리 역시 70년대에 대학교육까지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 부부는 오페라를 즐겨 듣고, 우아한 식기를 사용해 고급 음식을 집에서 매끼 먹지만

재클린은 몸을 치장하는 데는 시간을 아끼지 않고 신경을 쓰는데 반해

집안은 가정부가 없으면 먼지가 쌓이고 냄새가 나 감당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때문에 재클린에게 필요한 가정부는

 '적어도 마흔두살은 확실히 채우고 나이에 비해 외모가 떨어지는' 여자였고

하인들의 세계에서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유니스는 아주 이상적인 가정부였다.

그녀는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쓸데없이 말이 많지도 않고
청소녀 음식, 다림질 같은 집안일을 완벽하게 수행했으니까.

 

다만 그녀가 문맹이라는 것을 내내 숨기고 살았고,
필요하면 온갖 협박을 일삼아 죄책감 없이 이득을 취한 과거가 있으며
감정적으로 거의 닫혀버린 사이코패스에 가까워

그녀의 병든 아버지도 베개에 눌러 죽인 여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커버데일 가족의 집에는 책들로 가득찬 큰 서재가 있었고,
한 평생을 문맹이라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살아온 유니스에게 그것은 재앙이었다.

 

쪽지로 메세지를 남기거나, 전화번호부나 서류와 관련된 지시가 내려질 때마다

유니스의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소설의 긴장감 역시 높아진다.

 

'더 리더'에서 문맹인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수치스러워 모든 죄를 자신이 덮어 쓰는 한나처럼
유니스는 자신의 문맹이 탄로나 공개적으로 이 소식이 새어나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언어와 사고가 불가분의 관계이듯이,

유니스의 공격성과 감정적인 무감각함은 그녀의 문맹과 직결되어 있다.

 

문자언어를 통한 간접체험과 사회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문맹을 숨기기 위해 문자와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거부해 온 그녀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섬세하게 배려하거나

정상적인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자발적으로 포기해 버렸다.

 

 

 

 

친절하고 사근사근하게 다가오는 멜린다는 그녀에게는 업무를 방해하는 귀찮음이자

자신의 문맹을 들킬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라 피하고 싶을 뿐이다.

 

그녀에게 모든 인간관계는 감정을 나누고 친밀감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용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계획적이거나 치밀한 과정이 아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굳이 남에게 친근함을 꾸미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업무를 묵묵히 할 뿐.

 

너무 친밀한 관계는 그녀의 가장 큰 비밀 '문맹'이 발각될 수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었고

조앤처럼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그녀와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반쯤 미친 광신도이자 민폐덩어리인 조앤은

커버데일 가족에 대한 반감으로 유니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해오고,

조앤과 유니스의 만남은 서로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조합이 되어버리고 만다.

 

(소설에서는 유니스가 매일 밤 가지는 유일한 낙인 흑백티비의 폭력적인 영상이

그녀의 폭력성을 끌어올렸다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으로 100% 설명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그녀의 폭력성은, 멜린다에게 문맹을 들킨 순간 가지게 된 수치심과

그동안 갖고 있던 두려움이 한번에 폭발하면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촉발된 것이라고 보는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작품은 문맹자의 정서적인 건조함과 피폐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상류층과 지식인들의 허위의식도 날카롭게 꼬집는다.

 

 

커버데일가는 겉으로는 교양 있고 양식 있는 가족이지만, 사실은 속물스럽기 그지없다.

 

가장인 조지는 멋진 외모에 신사적인 면모를 지녔지만 대놓고 가정부와 가족을 확실하게 구분하며,
재클린은 가정부가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기를 기대하면서

'멋진 저택의 가사일을 기꺼이 맡아 주려는, 적당히 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가족의 계급의식은 아주 확고해서, 조지와 재클린이 '빅토리아 시대'를 꿈꾸는 이유는

'똑똑한 시녀가 우리 시중을 들고 요리사는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똑똑하고 교양 있는 시녀를 원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하녀에게 제공해 주는 것은

자신들이 쓰다남은 흑백 tv와 (가정부가 집에 머물게 하기 위한) 약간의 친절이다.

 

이들의 딸 멜린다는 아버지를 지배계급에 찌들어있다며 비난하지만,

그녀 역시 실제적인 행동 없이, 빈민가에서 구입한 드레스를 패션에 활용하는 등

보여주기와 구호에 머물러 있는 마르크스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책벌레인 아들 자일즈는 높은 지능과 많은 교양을 갖췄지만,

히키코모리에 근접한 편집광 스타일로 정상적인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오히려 의붓누나인 멜린다를 짝사랑하는데 그것마저도 실제 멜린다의 모습이 아닌,

자신이 이상화시킨 멜린다와의 극적인 관계에 대한 환상에 불과하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떠오른 것은 앞서 언급한 '더 리더'이다.

 

'더 리더'에서 한나가 저질렀던 범죄와 성격은 다르지만

문맹에 매우 큰 수치심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숨기려 했다는 점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유니스에게 가장 큰 처참한 단죄의 순간은 그녀가 종신병을 선고 받은 시간이 아니라,

그녀의 변호사가 온갖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글을 못 읽는다는 것을 선고한 순간'

기자들이 이 사실을 기사화해 전세계에 공표해버린 그 때였다.

 

그녀는 자신을 '괴물이자 불구자'로 여겼고,

그렇게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그녀는 어떤 시도로도 결점을 고칠 수 없었다.

 

그리고 커버데일 가족들은 성발렌타인데이 학살이후, 재산 문제로 계속해서 분쟁을 벌이고

아름답고 온화했던 저택은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아 황폐화되어 버리며 끝이 난다.

 

 

 

 

 

'절대 지식을 지혜로 착각하지 마라.

지식은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고, 지혜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된다

-샌드라 캐리

 

 

 

이 책은 장정일의 평에도 잘 나와있듯이,

문맹이 단순히 사회생활의 기술적 곤란 뿐 아니라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

그리고 책에만 코를 박은 채 현실과 타자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탐서가의 병폐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책을 그저 '읽기'만 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생각과 자신만의 가치관을 '창조'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모방가이자 독서광일 뿐, 능동적인 지식인이 결코 될 수 없다.

 

난 남의 뒤를 따라가기 바쁜 피동적인 독서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정보를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성찰의 독서를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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