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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책 읽기

허삼관매혈기-위화

DidISay 2012. 7. 23. 23:22

 

 

 

 

위화의 허삼관매혈기를 추천 받은 것은 꽤 오래 전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이 선뜻 가지 않았던 이유는 중국문학 자체에 대한 낯섦이 한 몫 했고,

(일본이나 서양문학은 유명 작가나 추천작들이 쉽게 잡히는데, 중국문학 특히 현대 소설들은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없더라.)

'허삼관이 피를 파는 이야기'라는 제목이 그리 매력적이거나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나 옷가지가 아닌 피를 판다는 것이 충격적이긴 했지만

신파조로 빠지거나 부성애나 모성애를 억지로 짜내는 글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그가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 건네는 따뜻한' 이라는 카피를 본 뒤에는 한동안 책장에 그대로 보관 중이던 소설이었다.

이건 뭐 제2의 가시고기 정도가 되려나 싶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와서야 퇴근 후에 가볍게 읽을 책을 고르다가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는데,

이 소설 생각보다 매력적이고 질질 짜고 우는 이야기도 아니라 꽤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한두시간만에 완독 ! :)

 

 

 

 

이 소설의 주인공 허삼관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다른 남자와 도망친 어머니 때문에

할아버지와 삼촌에 의해 자라난 평범한 사내다.

그리 교양 있지도 않고 배운 것도 별로 없는 가난한 서민이지만, 솔직하고 호방한 기상을 가지고 있다.

 

허삼관은 우연한 기회에 피를 팔게 되고

(피의 양을 불리기 위해 엄청난 양의 물!을 마시고, 소변을 참는 모습은 의외로 꽤나 희극적이다)

출중한 외모의 미녀 허옥란과의 결혼을 결심한 뒤에 뚝심으로 밀어부치는데 이 과정이 정말 호기롭다.

 

지켜보기만 했지 대화도 안해본 허옥란에게 밥 한끼를 사주고 이를 빌미로 시집을 와야한다고 주장하며 ㅎ

그녀에게 이미 결혼을 약속한 남자(하소용)이 있었음에도,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해 황주 한 병과 담배 한 보루로 결혼을 따내고 만다.

 

하아..남자다 남자 -_-;;

연애 과정 따윈 건너뛰어 버리고 바로 결혼 진입;;

 

 

 

 

이 허옥란 캐릭터도 꽤 재미있는데, 그녀는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부지런하며 생활력이 강하다.

또한 자신은 아주 예쁜 여자니 허삼관은 복 받은거라며, 명절(월경) 때는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 시점에서 중국의 여성의 지위에 놀랐다. 같은 시기를 그린 한국 소설들을 보면 이건 남편들이 여자들을 퍽하면 패는데 -_-;;)

 

이 소설의 장점은 아주 솔직한 대사와 인물들의 화끈함인데,

화가 나도 참고 예의와 체면을 중시하는 인물들이 주를 이루는 한국 소설들과는 달리

할 말 다 하고 뒤끝 없는 이들의 언행은 시원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창피하다는 생각 따위 없이, 억울하다 싶으면 대문 앞에 앉아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마음 속의 말을 다 내질러버리는 허옥란은 꽤 재미있었다.

이러면 또 허삼관은 쩔쩔 매면서 잘못했다고 꼬리를 내린다 ㅎ

 

 

 

이 소설의 주된 갈등은 허삼관이 가장 예뻐하던 첫째 일락이의 친부가

허삼관이 아니라 하소용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생기게 되는데,

이것도 한국식으로 부인을 패고 -_-;; 난리를 치는게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남의 아들을 키웠다며 '자라 대가리'라는 놀림을 받으면서도

(물론 투툴거리며 구박을 하긴 하지만) 계속해서 일락이를 키우고 아이가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피까지 팔아온다.

또한 그 뒤에 허삼관이 다른 여자와 한차례 바람을 핀 것이 들통나면서

자연스럽게 쌤쌤;;이 되어버리며 어느정도는 마무리;(..)

 

게다가 나중에 하소용이 죽게 되었을 때, 일락이가 도움을 주도록 설득을 하기까지 하고

그 뒤에는 일락을 자신의 피가 섞인 친아들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이 부부의 생활력과 위기대처력은 감탄할만한데, 미리 한두입씩 줄여 모은 쌀과 돈을 가지고

긴 가뭄을 옥수수가루죽만 먹으며 이겨내고, 아이들이 아프거나 사고를 치는 위기의 순간마다

허삼관은 어김없이 피를 팔아 이를 해결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항상 어떤 갈등이나 어려움이 있어도 희극적인 감동이나 웃음으로 마무리 짓는데,

이런 구조 때문에 한없이 가볍거나 무겁게 침체되지 않고 적당힌 선을 오가며 독자들을 쥐락펴락하는 느낌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허삼관의 구박에 섭섭해 집을 나간 일락이를 찾아

자신이 피를 판 소중한 돈으로 국수 한사발을 사먹이는 장면.

 

그리고 이제 아이들도 모두 커서 돈 걱정이 사라졌는데도,

이제 늙어버린 자신의 피를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감과 걱정에 빠져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이렇게 우는 허삼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자식들과는 다르게

허삼관의 아내는 이런 허삼관의 눈물을  괜한 노망이라고 생각하거나

쓸데 없는 걱정이라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피를 거절한 젊은 혈두 욕을 해주고

남편이 피를 팔 때마다 먹었던 돼지간볶음과 따뜻한 황주를 사주며 그를 배부르게 해준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내 남편이니 챙기는 그 살뜰한 모습에

어쩐지 짠한 웃음이 나오면서 마음이 훈훈해졌다.

 

 

 

 

맬러리는 5월 27일에 아내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중략)돌아보면 엄청나게 노력을 했고 진이 다 빠졌다는 기억밖에 없어.

 텐트 문 밖을 보면 희망은 사라지고 눈만 덮인 황량한 세계가 눈에 들어와.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그 반대편에는 마음을 붙일 좋은 것들이 많았어."

 

-피터 퍼스트브룩, '그래도, 후회는 없다' 中

 

 

 

국문학에서 내가 좋아하는 면모 중 하나는 웃음으로 눈물을 닦는 그 희극성이다.

이 작품 역시 이런 긴장과 이완의 반복을 엿볼 수 었었는데,

한국의 그 은근함과는 다르게, 좀더 화통하고 직설적인 삶의 모습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친근한 이 감정들.

 

 

양지의 뒷편에는 언제나 그늘이 있듯이,

우리의 삶이 한구석 그늘이 져있더라도 한줄기 비치는 따스한 빛 때문에

또 이렇게 힘을 내고 살아갈 수 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