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날씨는 맑음

한마디로 미친 것이다 본문

스쳐가는 생각

한마디로 미친 것이다

DidISay 2012. 9. 6. 00:23

 

 

 

 

 

고백하건데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글은 고양이 기피주의자의, 고양이에 대한 글.
그러니까 조금은 이상한 글일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난 동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에 속했지만,

그중에서도 고양이는 곁에 있으면 질겁을 하고 피할 정도로 거부감이 심했다.

 

그 이유가 이모댁에서 고양이에게 옮겨온 피부병 때문에 한달 넘게 고생을 했던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앨런 포의 '검은고양이'에서 느꼈던 음산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양이만 보면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퀼 것 같은 앙칼진 느낌 때문에 절대로 다가가지 않았다.

 

가끔 새끼고양이는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가 '그럼 한번 키워볼래' 라고 묻는다면, 얌전히 고개를 좌우로 내젓곤 했었다.

 

 

때문에 언제나 내가 사랑한 것은 물고기와 식물들처럼 털이나 살갗이 느껴지지 않는 것.

혹은 책이나 영화나 그림처럼 숨결이 없는 것들.

나와 직접적으로 접촉되지 않고 한두단계의 매체를 통하는 위협적이지 않은 것들이었다.

라디오처럼 내가 원하는 순간에 곁을 내주고 꺼버릴 수 있는 존재들.

나에게 결코 상처를 줄 수 없는 안전한 사물들.

 

 

 

꽃만 보면 멀리서부터 달려가 사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고,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고양이나 강아지와 같은 동물들도 당연히 좋아하리라 짐작하곤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이후에도, 나의 방에는 털이 날리지 않는 금붕어만 얌전히.

동그랗고 투명하게 빛나는 어항 속에서 살랑거리는 몸짓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아지는 좋아했지만 여전히 고양이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지지 않아서

내 이상형에는 독특하게도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남자가 포함되어 있었고,

길을 가다 길고양이가 지나가면 기겁을 하고 피하곤 했다.

 

 

 

 

그리고 지난 봄부터 나에게 작은 거슬림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내가 살고 있는 건물의 한 주민이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하필이면 밥그릇을 놓는 곳이 현관 바로 근처라

나는 지나갈때마다 번번히 그 고양이 밥그릇을 보곤 했다.

 

운이 나쁠 때면 현관 앞을 가로막고 잠을 자는 고양이 때문에 나가길 망설여야 했고,

퇴근 길에도 밤의 숨소리를 닮은 고양이의 짙은 털색 때문에 깜짝 놀란 것이 여러번이었다.

 

고양이가 깨서 갑자기 달려나가 날 놀라게 할까봐, 구두끝을 올리고 살금살금 다니고 있다 보면 

어쩐지 짜증이 솟구쳐서 관리실에 말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한창 더위에 또 이 고양이가 어딜가서 쉴까 싶어 그냥 두고 지켜보곤 했다.

 

 

 

하지만 봄,여름 그리고 가을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기까지

고양이와 수없이 계속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이 낯선 존재에게 익숙해졌다.

더이상 거부감이 든다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라

서로 무언의 약속을 하듯이 움직이게 된 것이다.

 

고양이 역시 하루 중 일정한 시간에 나가고 들어가는 나에게 익숙해 진건지

내가 계단을 내려와 가만히 현관 앞에 서면

예전처럼 계속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길을 비켜준다.

 

그리고 나 역시 어떻게 피해서 갈까라고 고민하거나

지레 겁을 먹어서 한참 망설이기 보다는 가만히 고양이를 쳐다보고 기다리게 되었다.

 

 

(나 스스로에게 놀랄 일이지만) 가끔 과자 한두개를 놓고 가거나 물을 따라 줄 때면

고양이는 바로 와서 먹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참을 가다 뒤돌아 봤을 때 도도하게 과자 한입을 물고 그늘로 유유히 가고 있다.

연한 호박색의 눈동자를 빛내면서.

 

 

그가 아닌 그녀일 것만 같은.

고양이의 이런 꼿꼿한 새침함이 눈길을 끌었다.

 

환하고 꽉 차있는 보름달이라기 보다는,
요염하고 깜찍한 계집을 닮은 그믐달 같은 생명체.

 

난 여전히 길의 낯선 고양이들은 피하게 되지만,
우리집 현관 앞. 빨간 먹이통 주인.
진한 회색빛의 고양이 만큼은 나에게 '그 고양이'가 된 것이다.

 

 

 

먹이에 쉽게 마음을 내주거나 구걸하지 않는 그 비굴하지 않음이 마음에 들었다.

때가 타고 지친 모습의 '길고양이'일지라도.

 

그래서 가끔 고양이가 더위에 지쳐 '퍼질러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괜히 웃기다는 생각이 들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마치 완벽주의자의 예상치 못한 허점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나는 여전히 그녀를 만진다거나 가까이 가지 않는다.

다만 그저 잠시 바라볼 뿐이다. 나름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황금빛 눈의 고양이 역시 나를 보면 황급히 피한다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사뿐거리면서 혹은 느긋하게 사라져간다.

 

 

 

 

유독 고양이에 대한 그림이 많았던 노석미 작가의 전시에서
'너는 때론 향기롭지만 뜻하지 못한 순간에 거칠다.
그리고 다시 따스하게 어루만져 준다.
한마디로 미친 것이다'란 문구가 있었다.

 

향기롭지만 뜻하지 못한 순간에 거칠게 꼿꼿한.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따뜻한 눈이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은.

대상이 미친 것이라면, 난 미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 역시 세파에 쉽게 구부러지지 않는 앙칼짐을 갖고 싶다.

 

하긴 내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를 '미친 짓'이라 표현하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