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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책장 엿보기 2. 서재와 서재의 만남.

DidISay 2012. 9. 6. 13:17

 

 

 

 

우리집엔 책을 꽂아두는 공간. 거창하게 말하면 서재

진실을 말하면 책꽂이 몇 개의 묶음이 세 곳 존재했다.

 

아버지의 책꽂이는 거실 한쪽 벽에 천장까지 닿을듯한 높다란 책꽂이였다.

주말이면 항상 사라지던 긴 낚시대와 직접 만드신 괴목탁자가 그 곁을 지켜서,

나무향과 바다 냄새를 동시에 풍기며 책들은 존재감을 뽐냈다.

 

 

어머니의 서재는 방 한쪽의 베란다를 개조해서 만든 공간에

나와 내동생의 작은 손수건이나 천가방 등이 탄생하곤 했던 미싱들과 함께 있었다.

 

어렸을 때는 커다랗고 매우 고풍스러운 모양의. 발로 밟아 움직이던 그 미싱은

어느새 미끈하고 새하얀 브라더 미싱으로 바뀌었지만

햇살이 투명하리만치 좋은 날이면 여전히 천조각들과 실밥들이

책과 공기 사이를 천천히 부유하곤 했다.

 

 

나의 서재는 거실쪽 베란다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생과 함께 사용하던 내 서재는 역시 동생과 나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유년기에는 나와 내 동생의 장난감 상자와 함께.

좀 더 커서는 온갖 문제집과 동생의 농구공들, 기타들...

그리고 우리 남매 각자의 취미생활 용품들과 함께 공존했다.

 

인문계였던 내 책에 온갖 문학작품들과 인문서적들이 꽂혀있었던 것과는 달리,

내 동생의 책장엔 화학과 물리에 대한 이야기들, 기술서적들이 대부분이라

나이가 들수록 점점 그 성격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 서로의 서재에서 쓱쓱 책을 뽑아 보는 일탈을 즐겼다.

 

 

 

 

우리집은 다른 집에 비해서 책이 꽤 많은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나와 내 동생은 유치원 때부터 한달에 한번씩 책구입비용을 부모님에게 따로 배당 받았고

부모님 역시 한달의 일정 금액을 떼서 책을 구입하셨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서점에 가서 책을 골라 차 뒷자석에 가득 싣고 오는 것이

일종의 월례행사처럼 이루어지곤 했다. 

 

부모님은 우리가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면

간단한 조언을 해주시긴 했지만 어떤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으셨고,

부모님 서로에게도 책을 고르는 일은 '자신만의 영역'이었다.

 

 

 

 

 

어제 문득 버스를 타고 가다 기억이 난 것은.

내 서재가 아닌 우리 부모님의 서재였다.

 

한 친구집에 놀러갔을 때 내가 가장 신기했던 것은

집안의 책장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 집은 서로의 책이 결코 섞이는 법이 없었다.

마치 도서관의 과학서적과 철학서적의 분리된 영역처럼

서로가 서로의 존재감을 지키며 독립성을 유지했다.

 

 

 

 

다소 보수적인 성향이었던 어머니의 공간에는 고전문학과 안도현,도종환 시인의 시집들이 많았고

여성작가들의 고운 에세이나 여행기, 일본에서 나온 퀼트나 뜨개질 서적들도 다수를 차지했다.

 

반면 아버지의 서재엔 무라야미 하루키나 장정일의 책, 조정래씨의 장편소설들

그 외 인문사회분야 사상가들의 서적들이나 사진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머니의 서재가 욕설이나 파격이 거의 없는.

어딘지 얌전하고 단정해보이는 아름다운 문체의 글들이 주를 이뤘다면

아버지의 서재엔 좀더 과격해 보이고 동적이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집었다가도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그냥 내려놨던 책들이 많았다. 

 

어머니의 책들이 나에게 다사롭고 아름다운 글의 세계를 열어줬다면,

아버지는 이에서 한걸음 나아가는 비밀스러운 어른들의 세계를 의미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의 서재는 너무 거칠다며, 좀더 어른이 되면 건드리라고 권하곤 하셨는데,

반면 아버지는 엄마의 책만 읽지 말고 자신의 책도 읽으라고 비밀스럽게 속삭이곤 했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 난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충고를 좀더 충실히 따랐다.

엄마의 눈을 피해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뽑아, 한두권씩 읽고 갖다놓곤 했던 것이다.

 

 

두분의 독서성향은 거의 공존되지 않았고,  

간혹 두분의 서적 중 일치하거나 중복되는 것은 가끔 나와 내 동생의 서재 한쪽에 꽂히곤 했는데

때문에 이런 책들은 나와 내 동생이 한번씩 꺼내 뒤적이곤 하는 익숙한 친구가 되어줬다.

 

두분의 서재를 비교하는 것은 확실히 재미가 있었는데,

같은 책일지라도 두분이 적어놓은 메모의 성격이 매우 다를 때가 많았고

젊은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했던 설익은 생각이나 다소 유치한 이야기들도 모두 담겨 있었다.

마치 완전히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처럼 두 분은 같은 공간에 살고 있으면서도 확실히 달랐다.

 

 

 

 

'서재 결혼시키기'에는 똑같은 판본의 책을 나눠 보관하고 있던 어느 부부가,

무심코 배우자의 판본을 자신의 서재에 보관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진정으로 결혼했다는 것을 실감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른 독서성향을 가지고 계신 두 분이 오랜 연애를 거쳐 결혼을 하고,

또 결혼 후에도 서로의 공간을 굳건히 지켰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영역에 스스로를 매몰시키지 않고

서로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지켜냈다는 점에서

어른이 된 난, 두분을 존경하게 되었다.

 

 

미래의 나는 어떤 서재와. 어떤 만남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