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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오빠가 먼저 앉아.

DidISay 2012. 10. 5. 00:28

 

 

 

커플은 원래 서로 닮는다던데, 나와 남자친구는 외모상으로는 다른 점이 많다.

공통점을 찾으면, 피부가 하얀 편이고 키가 크다는 것 정도.

나머지의 생김생김이나 전체적인 인상은 많이 다르다.

 

그의 눈은 홑꺼풀에 슬쩍 처진 눈매이며, 내 눈은 쌍꺼풀이 있고 눈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그의 피부는 분홍색이 잘 어울리는 쿨톤, 나는 오렌지 빛이 잘 어울리는 웜톤이다.

그의 어깨는 넓고 네모난 각이 진 편이고, 내 어깨는 좁고 둥글다.

그가 순하고 느긋한 충청도 남자라면, 난 서늘하고 도회적인 인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우리가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비슷해서가 아닌가 싶다.

만약 남자친구가 인간으로서 매력적인 사람이 아닌, 단순히 이성이 주는 두근거림만 주는 사람이었다면

난 그와 이렇게 오랜 시간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의 외형적인 면이 아니라,

슬쩍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정직하게 행동하는 반듯함 때문이었다.

설사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말이다.

 

그의 큰 키나 넓은 어깨도 물론 매력적이었지만,

그보다는 올바른 행동을 해야할 때 단호하게 다물어지는 입매가.

약한 사람들을 볼 때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는 눈가와 눈썹의 움직임이 더 좋았던 것이다.

 

설사 누군가가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지라도,

적어도 나에겐 그것이 한 사람에 대한 존경이나 신뢰를 쌓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연인'이란 말은 戀人.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의미의 '연'자를 주로 사용하지만,

난 시간이 지날 수록  나란히 잇닿아 있다는 의미의 聯人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서 나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도,

반대로 나를 위해서 그가 무조건적인 희생이나 봉사를 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계를 시소에 빗댈 수 있다면, 한쪽씩 번갈아가며 기우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난 그가 나를 여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보호해줘야 하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좋은 사람으로 존중해주길 바란다.

 

때문에 그가 어느날 나에게 맛있는 식사를 사주고 가방을 들어준다면,

그건 내가 여자라 약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 아니라

퇴근길에 지친 나를 위로해주려는 마음. 배려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고마워 한다.

 

나 역시 그가 힘든 업무를 마치고 나를 만나러 온 날이면,

그에게 근사한 식사를 사주고 편안한 화제로 그를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를 힘들게 한 무엇에 대해 짐짓 더 화를 내주며 공감하기도 한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어떤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약하고 지친 사람에게 그 에너지를 전달해주려고

서로를 배려하는 과정이 인간관계의 그리고 연애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쪽에게 감정이나 물질적인 어떤 요소가 일방적으로 기운 관계는,

기형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관계의 법칙이었다.

 

그리고 난 그가 나의 뜻이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친구이자 연인이자 멘토이길 바랐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와 나 각자의 영역이 맞닿는 그 순간을 사랑했다.

 

 

 

 

 

평소에 버스나 지하철에 빈자리가 났을 때, 그는 항상 나를 먼저 앉히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야근에 기진맥진 했을 것 같은 날.

혹은 먼 거리에서 나를 보러 온 날

그 빈자리는 내가 아닌 그에게 먼저 돌아간다.

 

처음에 머쓱해하며 사양하던 그를 억지로 앉히곤 했는데,

난 이것이 우리 집 혹은 직장 근처까지 힘들게 온 그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도 많이 익숙해져서

"아니야, 오늘은 오빠가 먼저 앉아. 오늘 열심히 일하느라 힘들었잖아."라고 말해주면

씩 하고 웃으며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곤 한다.

자신이 '갑'이나 '왕' 이 된 것 같다면서.

그러면 난 그 단순하면서도 밉지 않은 유치함에 웃고 만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평소에 내가 '갑'이거나 '왕'의 위치인 경우가 더 많으니,

이런 때만큼은 그가 '왕'이 아닌 그보다 더 높은 무엇이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것으로 일상의 고단함이 조금 덜어진다면.

 

 

 

 

그는 우리가 알고 지낸 그 오랜 세월 동안 매번 나를 집까지 데려다 줬다.

그리고 내 방에 불이 켜질 때까지 언제나 1층 현관 아래에서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주곤 했었다.

그래서 난 그의 뒷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미안한 마음에, 오늘은 그냥 집에 바로 가 라든가.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 내가 걸어가는 모습 지켜봐줄게 라고 말을 해도

그러면 자신의 마음이 편하지 않다며 계속 손을 흔들곤 했다.

 

 

 

 

언젠가 나도 그도 나이를 많이 먹어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을 때,

(하지만 내가 몇살은 젊으니 조금은 더 기력이 있을거라고 예상해 본다면)

이제는 힘이 많이 빠진 그의 뒷모습을 나도 오래오래 지켜봐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는 어깨도 조금 쳐지고 키도 줄어들었을 그의 흰머리 희끗한 모습을

다정한 시선으로 지켜보며 든든하게 받쳐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그리고 그의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는 동반자였으면 한다.

 

 

 

그 때에도 내가 그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을까?

만약 그 먼 미래에도, 빈자리가 생긴다면 '오빠가 먼저 앉아'라고 말해줄 것이다.

때로는 연인처럼. 때로는 어머니처럼.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